김혼비 <아무튼, 술>
껌딱지였던 둘째가 드디어 중학교에 들어갔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꼼짝도 않다가 식사 시간에만 얼굴을 보여준다. 아이의 동굴 세계를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으며, 나는 그 빈자리를 거의 15년을 멀리 했던 드라마에게 내주고 있다.
2주 전에는 <술꾼도시여자들>을, 지난주에는 <멜로가 체질>을 완주했다. 우연히 찾아본 것 치고는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것처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드라마였다. 세 명의 여자 주인공이 나온다는 설정부터 기쁘면 기뻐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승전'술'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드라마 제목을 살짝 갖다 쓴다면 <술꾼 제주 여자들>이라 할까? 나와 오여사, 주책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러니 벌써 만난 지 40년을 바라보는 관계라 하겠다. 서로 눈 한 번 부라려 본 적 없고, 연락 한 번 끊어본 적 없는 찐친들이다. 그 끈끈함을 이어주는 건 물론 술!
최고의 술친구와 함께 산다는 건
세상 모든 술이 다 들어 있는 술 창고를 집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언제든 원하는 때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 김혼비 <아무튼, 술> 중
주책은 닉네임이다. 술과 책을 좋아한다 하여 자신을 '주책'이라 스스로 명하였다. 책방지기인 주책은 낮에는 책을 팔고, 밤에는 술을 사는 주책야주의 생활을 하고 있다. 나와 주책의 관계는 각별하다. 예전 제주도에는 결혼식 전전 날 도새기(돼지) 잡는 날, 전날 가문잔치 날, 결혼식 당일, 이렇게 3일 잔치를 했다. 그 3일을 내내 따라다니며 부신부(가장 친하고 믿을만한 친구로, 들러리이면서 신부의 총괄비서라 할 수 있다) 역할을 해준 게 주책이었다.
마흔셋의 나이에 둘째를 임신하고 유산 위기로, 집에만 누워있던 내게 같이 먹자며 들고 온 삼계탕, 갑작스러운 하혈로 두려움에 떨던 나를 뒷 좌석에 눕히고 병원까지 달려갔던 그의 차 안. 재작년 서울 살던 큰아이의 행방불명을 경찰서에 신고한 후, 울면서 전화하자마자 선배들과의 술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하룻밤 같이 있어 주었던 주책. 그 모든 날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맏이로 태어나 홀어머니의 자랑과 위로가 되고 싶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무미건조했던 나에게 주책은 그렇게 친구가 무엇인지, 우정의 모습은 어떤 건지를 보여준 친구이다.
여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조용필의 팬클럽 회원이다. 남편과의 전화를 조금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기 위해 남편 번호를 '용필 오빠'로 저장해 두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듯하다. 오여사는 조용필 콘서트 소식이 있으면 공연 원정대를 꾸린다. 전투적인 티켓팅을 하고, 단톡방을 만들고, 매일 신곡을 올리며 콘서트 예습을 시킨다. 아이 때문에 갈 수 없었던 나도 작년에는 원정대 일원으로 올림픽 펜싱경기장에 입성, 오여사의 '오라버니' 공연을 함께 했다.
일단 오여사가 있으면 우리는 '코미디가 체질'이 된다. 유쾌 상쾌 통쾌하다. 허리가 자주 아픈 오여사가 친구들 만남에 빠질 수 없어서 거의 누운 자세로 술병에 빨대를 꽂고 마셨다는 일화는 지금도 동창 모임에서 자주 회자된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 김혼비 <아무튼, 술> 중
오여사가 말아주는 소맥은 예술이다. 나는 맛나게 들이켜고 다시 오여사 앞에 빈 맥주잔을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나는 맛나게 마실 뿐, 내가 한 번 말아 보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최상의 술맛이 더 중요하니까. 그 와중에 주책은 카스 대신 캘리를 시키면 안 되겠냐고 한다. 손석구를 향한 우리의 애정으로 오늘 우리는 그래, 캘리로 가자.
먹을 수 있을 때
먹을 벗이 있을 때
실컷 먹자.
주책이 일본 하이쿠 모음집을 읽다가 주책스러운 하이쿠를 써 보냈다. 나는 그 와중에 글자 수를 센다. 3행 17자 이내의 하이쿠 형식에 맞는지 확인한다. 오여사는 '항생제에 취하지 않고 술에 취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는 답글을 올렸다.
60이 가까워지는 나이, 이런 우리의 술 모임도 끝이 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마시면서 다음 주에 있을 건강 검진에 떨고, 아프신 부모님 걱정으로 한숨을 쉬다가도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 나오는 소주 첫 잔의 꼴꼴꼴꼴 소리를 따라 해 보기도 하면서 맛나게 마시고, 맛깔나게 웃어댄다.
요즘은 '역세권'보다 '슬세권'이란다. 우리에게 슬세권이란, 슬리퍼를 신고 다닐 수 있는, 15분 정도의 거리에 우리가 모여 사는 것이다. 같은 마을로 이사를 할까, 아예 공동주택을 지어 같이 사는 건 어떨까, 만나면 시나리오를 썼다 지웠다 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노후도 같이 하고 싶다. 아프고 죽어갈 우리를 서로 보듬고 돌보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들이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외치고 싶다. 얘들아, 우리에겐 '술세권'이 중요해.
우리에게는 먹어야 할 맛난 안주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처럼 비장하게 얘기해 본다) 도다리, 한치, 성게회, 삼치, 방어, 굴. 앗차차! 12월 내 생일에 꼭 먹어야 하는 과메기까지.
오여사가 말아주는 소맥 맛나게 먹고, 우리 오늘은 노래방 가자. 지난번처럼 100점 맞은 사람은 만원씩 모니터에 붙이는 거야. 저번에 물로 잘 안 붙길래 내가 오늘은 스카치테이프 들고 왔다. 얘들아, 나 잘했지?
대외적 자아로서
바짝 벼려져 있던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세 잔 마시면서
조금씩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져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술이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도 좋다.
- 김혼비 <아무튼, 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