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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29. 2023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

아 옛날 얘기, 라떼 얘기 좀 해도 되나.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묵상하다 보니 제목이 저렇게 나왔는데, 인생 전반을 놓고 자신감 추이를 살펴보면 이십 대가 가장 수치가 높았던 것 같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핵심 키워드가 ‘청춘’이다. 그냥 어딜 가든 나는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말을 좀 잘했다 싶을 때는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이 말도 잘하네’가 되는 거고 그날따라 목청 컨디션이 좋아서 노래가 잘 나왔다 싶으면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이 노래까지 잘한다’ 뭐 그런 식이다. 내 세상이었다.


이게 언제 한번 꺾이냐면 취업 준비할 때다. 학교 동기가 대기업에 취업이 되었다면서 영업직이라 차를 뽑아준다는 데 SUV가 낫겠지 어쩌지 하며 학교 도서관 휴게실에서 떠들어 대는데 세상 부러웠다. 영웅담을 실컷 늘어놓던 동기는 이런저런 서류를 떼러 행정실로 가버렸고 나는 친구들과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에 학교 앞 가성비 고깃집 ‘할매집’에서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계속되는 낙방에 나는 점점 작아졌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그리고 다시 회복하게 된 건 취업 후 사회생활에 적응하던 삼십 대 때.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이 양복을 입고 부활했다. 우체국 직원에게 소개팅을 제안받거나 회사 후배가 고백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안 죽고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대사처럼 아직 ‘살아있네’를 양껏 느끼며 살았다.


자신감 곡선은 사십 대에서 다시 추락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이 많이 쪘고, 청년이 아니라 중년 쪽에 속하게 되면서 외적인 메리트는 모두 증발해 버렸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세요’ 할 정도로 낯설다. 내 시선에서 나는 아직 ’청년‘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입수되는 정보와 내 안에서 처리되는 정보가 충돌하며 자주 에러를 일으키다가 마침내 자아인식 시스템이 가장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면서, 나는 나의 현재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자신감은 다시 바닥을 향해 내리 꽂혔다. 이 내용은 브런치 북을 발행하며 상세히 기술한 바가 있다(광고 맞음)


https://brunch.co.kr/brunchbook/change​


누구에게나 자신감의 원천이 있다. 잘하는 거, 언젠가 칭찬받았던 분야 말이다. 요리는 내가 남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같고 그래서 요리하고 있노라면 자신감이 생긴다거나, 여행할 때나 혹은 클럽에서 춤출 때 같은 게 하나씩 다 있다. 자신감 회복을 위해서는 그런 것들에 몰입하는 게 첫 번째다. 더 많이 접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신감에 절어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래서 나는 다시 ’키 크고 뽀얗고 잘생긴 청년‘을 소환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살을 빼겠다는 거다.


아주 조금만 복원되더라도 지금 내 나이 동료들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중에 대머리도 얼마나 많은데 아직 내 머리털은 짱짱하니까.


말초적이고 단순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금번 자신감 복원 프로젝트 실시로 키 크고 몸 좋은 중년이 좀 소환되면 좋겠다.


그래, 나 다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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