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춘 Sep 22. 2024

명반을 고르는 기준

처음 레코드 가게에 발을 들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전까지는 앨범을 직접 사지는 않고 방에서 FM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최신 가요가 나오면 녹음 버튼을 눌러서 카세트테이프에 저장해서 들었다. 아니면 친구나 학원 선생님에게 테이프를 빌려서 녹음해서 듣기도 했다. 그런데 듣고 싶은 노래가 생겼는데 라디오에 자주 나오지 않고 지인들에게도 앨범이 없는 경우에는 조금 난감했다.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이 그랬는데 라디오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녹음 버튼을 누르려고 치면 타이밍이 안 맞아서 중간에 잘리거나, 녹음이 잘 되다가 갑자기 말미에 광고가 나오거나, 사회자 멘트랑 겹치는 일이 많았고 앨범을 빌려보려 해도 지인 중에서 박정운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인가수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곡 하나만 인기를 끄는 경우에는 앨범을 통째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없었다. 우연히 가요 프로그램에서 박정운을 보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라디오에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녹음을 번번이 실패했다. ‘아유 됐어 그냥 살래’ 하는 마음으로 레코드 가게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카세트테이프가 4천5백 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5천 원을 들고 가면 거의 다 살 수 있었다.


처음 혼자서 레코드 가게를 가는지라 이것저것 구경을 하려면 좀 규모가 있는 데로 가야 했다. 동네에도 하나 있긴 했는데 구멍가게처럼 좁아서 구경보다는 필요한 것만 사고 빨리 나와야 하는 곳이었다(여자 사장님이 계속 지켜보는 구조였다) 옆 동네 시장 안에 큰 레코드 가게가 있다. 지폐를 주머니에 잘 넣고 그곳으로 향했다.


당시는 신승훈이 모든 차트를 씹어 먹고 있던 때라 레코드 가게는 신승훈의 앨범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안팎으로 신승훈 노래가 계속 플레이되고 있었다. 신승훈 좋지. 하지만 내 목적은 박정운이다. 쭈뼛쭈뼛 카세트테이프를 뒤적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다가왔다.


“학생 뭐 줄까? 서태지?”


“아니요 혹시 박정운 테이프 있나요”


“박정운?“


”네 오늘 같은 밤이면요“


잠깐만 하며 어디론가 가더니 카세트테이프를 두 개나 가져오신다. 하나는 ‘최신 발라드 히트송’이고 하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다.


”이거 맞는지 한번 봐봐"


발라드만 모아놓은 불법 편집 테이프인데 앞면(정확한 표현은 A면) 세 번째에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 트랙이 있다. ‘네 이거 맞네요’ 하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도 건네준다.


“이걸 많이 찾던데 학생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1집. 그래 요즘 인기 많은 건 내가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난 알아요’는 이미 라디오에서 수차례 나왔기 때문에 곡 잘림 없이 완벽하게 녹음을 해 놓은 상태라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아저씨가 건네 준지라 한번 쓱 훑어봤는데 ‘환상 속에 그대’도 있고 ‘YO! TAIJI’도 있었다. ’난 알아요‘의 앞부분 랩을 한 소절을 아주 멋지게 쏟아내고 요! 태지! 하며 짧게 끝내는 앨범의 인트로 형식의 곡인데 그것도 참 멋있긴 했다.


살짝 흔들렸다. ’최신 발라드 히트송‘에는 박정운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다른 곳들도 있다(신승훈도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다른 곡들도 들어보고 싶긴 하다. 아 어쩌지. 하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래 난 박정운 때문에 여기 왔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1집보다 발라드 히트송이 몇백 원 더 쌌다.


싸고 양 많은. 그래 이걸로 해야겠다.


”그냥 이걸로 할게요“


”그래 이게 훨씬 낫지. 곡도 많이 들어있고. 서태지는 다음에 와서 사”


“네”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열심히 들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산 카세트테이프이라 그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않고 애지중지했다. 결국 나중에는 테이프가 늘어지고 꼬여서 버렸다. 당시 불법 편집본 카세트테이프는 정해진 용량에 비해 훨씬 많은 곡을 넣다 보니까 그런 일이 잦았다.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날렸다.


대신에 서태지 1집과 같은 해에 나온 ’TAIJI BOYS Live&Techno Mix’ 앨범을 LP 판으로 가지고 있다(표지에 만화로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가 그려져 있고 그 뒤에 영어로 LIVE라고 적혀있다) 집에 전축(스피커 큰 게 두 개나 달리 대형 오디오가 당시 유행이었다)을 들인 기념으로 아버지와 함께 LP 판을 사러 갔다. 점원에게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을 달라고 하니 2개를 가져왔다. 정규 1집 앨범과 라이브 앨범.


라이브 앨범? 이건 또 뭐지 하며 갈등에 빠졌다. 열심히 두 개를 비교해 보니 라이브 앨범에는 1집에 있는 곡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었고 특히 ‘환상 속에 그대’가 여러 개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앨범 총 러닝타임이 눈에 들어왔는데 1집에 비해 라이브 앨범이 조금 더 길었다. 그래, 기왕이면 긴 게 좋지. 그래서 라이브 앨범을 선택하게 되었다.


앨범을 고르는 일관된 기준. 즉, 싸고 양 많은 것을 따르느라 나는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영원히 소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전 04화 앨범을 기다리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