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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춘 Oct 03. 2024

내 속에 삼킨 LIVE WIRE

노래자랑에 나가는 걸 좋아한다. 문제는 항상 예선 탈락을 한다는 점이다. 영화 ‘올드보이’에 이런 대사가 있다. ’15년 동안의 상상훈련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실험해 봐야겠다‘ 적어도 나에겐 효과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특히 상상하는 걸 즐겼는데 주로 나는 밴드 보컬이나 청춘 멜로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었다. 내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 소녀들이 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줍은 소녀가 조심스레 나에게 쪽지를 건네지. 뭐 그런 류의 상상. 그래서 노래자랑이 있으면 항상 참가했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내가 상상한 분위기와 스토리가 연출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전에,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예선이라는 걸 치러야 한다. 예선을 통과해야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기회를 얻는다.


고등학생 때 어느 날 공지가 붙었다. 축제 때 노래자랑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선을 하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방과 후 음악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교복을 입고 기타를 치는 스쿨밴드 보컬 같은 느낌으로 소녀들(남고였는데 축제 때는 인근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왔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았다. 오케이, 참가다. 공지에 적힌 시간에 맞춰 음악실로 갔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몇 학년 몇 반 누구 하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당당하게, 아니 많이 뻘쭘하게 무대에 올랐다.


무반주였다.

심사위원은 음악선생님이고.


내가 부른 노래는 지니의 ‘뭐야 이건’. 스쿨밴드 보컬 콘셉트를 잡았으니까 적절한 선곡이다. 혼자 록밴드 보컬처럼 몸을 강렬하게 움직이며 1절을 모두 불렀을 때 선생님이 그만 됐다는 신호를 줬다.


“됐어, 잘 들었다. 그런데 너 왜 그렇게 흐느적거리냐”


“아 네”


가방을 챙겨서 음악실을 나왔다. 예선이기 때문에 다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축제 당일이니까 그날 내 모든 걸 쏟아부으리라 생각했다. 화려한 조명과 수려한 내 무대 매너 그리고 열광하는 소녀들. 혹시 내 플래카드 같은 게 있을까. 있다면 기분이 무지 좋을 것 같았다(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며칠 후 예선 합격자가 발표됐는데 내 이름은 없었다. 음악 선생님 평소에 좀 열린 분이라 생각했는데 실망이 컸다. 다양한 장르를 보여줘야 축제도 살고 학교 이름도 날릴 텐데 록 음악이라고 배척하시다니. 역시 클래식 전공자들은 록의 세계를 이해 못 한다며 투덜댔다.


내가 예선에 탈락한 해가 우리 학교 축제에서 노래자랑 이벤트를 처음 시도한 거였는데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친구들의 후기(나는 물론 보러 가지 않았다)를 들어보니 누가 엄청 잘했다거나 인기가 많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아,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하며 엄청 아쉬워했다. 이게 다 음악선생님 때문이다. 좋아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내가 아니라) 음악선생님이 설마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해에 또 나갔다.


다시 예선이다.

심사위원은 작년이랑 같이 음악선생님이고.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는지 이번에는 노래방 기기도 가져다 놓았고 우리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도 참가가 가능했다. 덕분에 다른 학교 여자 학생들도 많이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떨리는데 여자애들까지 있다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개중에 진정 록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하며 마음을 다잡고 내 이름 옆에 노래 숫자 네 자리(노래방 기기에 입력될 노래 번호)를 적어 놓고 앉아서 기다렸다. 이번에도 역시 지니의 ’뭐야 이건‘. 마이크를 들고 로커 특유의 모션, 그러니까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어깨를 안으로 말아서 허리를 펴서 뒤로 살짝 젖히고 고개는 약간 뒤로 젖히는 자세. 그렇게 다시 노래를 불렀다. 앞으로 뒤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전주 중에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마 또 나왔다”


오 나를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다. 그렇다면 선생님도 나를 기억하겠지. 아, 내가 이런 인재를 저번에 아쉽게 탈락시켰구나 하는 자각이나 후회나 늦은 깨우침으로 아니면 측은지심이라도. 나를 무조건 합격시켜 주겠구나 싶었다. 노래를 하며 조금 떨었지만 왠지 합격은 할 것 같았다. 설마 두 번짼데, 나를 아실 텐데. 며칠 후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내 이름은 또 없었다.


록이 자라기에 척박한 토양을 가진 나라 대한민국. 그리고 대학시절 찢어진 청바지에 긴 머리를 하고 록 음악에 심취한 선배들에게 여자를 뺏긴 적 있는 클래식 전공자 음악선생님(물론 멋대로 상상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내가 나설 무대는 없었다. 그렇게 무대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태지 노래 가사처럼 라이브 와이어는 그저 내 속으로만 삼켰다.


대학교에도 축제라는 게 있었고 메인이벤트로 노래자랑이 있었다. 물론 나는 예선에 나갔고 2년 연속 서태지의 ‘LIVE WIRE’를 불렀다.


결과?

음 그건 그냥 열린 결말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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