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펜팔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한일교류 어쩌고 협회’라는 곳에 원하는 국가와 나이를 정하고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상대편 주소를 보내줬다. 나는 일본에 있는 내 또래 여학생으로 정하고 돈을 보냈다. 곧 우편으로 상대방의 주소와 영어 작문 책자 등이 날아왔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한다. 나오코 오카모토. 첫 편지를 썼다. 주로 영어 작문 책자에 있는 걸 응용해서 자기소개와 가족 사항이나 사는 동네를 소개하는 무난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게 실제로 답장이 올까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첫 번째 답장이 왔는데 그녀도 비슷한 책을 가지고 있는지 내용이 나와 거의 비슷했다. 하긴 한일 양국 중학생들이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는데 뭐 얼마나 깊이가 있을까 아이엠 어 보이 유 얼어 걸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름 영어사전을 열심히 찾아가며 어려운 영작도 시도해 보고 ’이것은 한국의 돈이다‘라며 천 원짜리 지폐도 동봉해서 붙여보고 잡지에 있는 사진을 오려서 붙이기도 하고 정성을 쏟았다. 그 덕분인지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펜팔의 정해진 순서에 따라 슬슬 서로의 사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네 사진을 보내줄 수 있니‘라고 내가 보냈고 며칠 후 나오코의 사진이 도착했다. 나오코는 어느 시골 냇가에서 붉은 벽돌색 체육복을 종아리까지 걷어 올리고 친구와 웃고 있었다. 그나마도 조금 멀리서 찍어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덩치도 조금 있었는데 내가 기대했던 작고 귀여운 일본 소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어쨌든 이번엔 내가 사진을 보낼 차례다. 한국의 핸섬보이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혹시 나오코가 자극을 받아서 본인이 아주 잘 나온 사진을 하나 보내 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 그런데 내 사진이 별로 없었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진을 몇 개 받았는데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건 안돼 엄마”
“왜 크게 잘 나왔구먼 웃고 있고”
엄마의 기준에는 내가 크게 나오고 활짝 웃고 있으면 된 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더 시크해야 했고 굳이 웃는 사진이라면 살짝 미소 정도 그어주는 정도여야 했다. 엄마가 제시한 사진에서 나는 이빨을 훤히 다 보이며 맹한 표정으로 그냥 다 내어놓고 웃고 있었다. 이사진은 절대 안 되지. 친구랑 찍은 반항기 있어 보이는 멋진 사진이 있었는데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다.
“엄마 종태랑 찍은 사진 있잖아 교복 입고. 그거 어딨어?”
“몰라 찾아봐”
나오코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마가 출근하면서 우체국에 들러 보내줬다. 국제 우편이다 보니 우체통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우체국에 갔어야 했는데 집 근처에는 없었다.
“엄마 그러면 그 종태랑 찍은 사진 그거 찾아서 줄게. 그 사진까지 넣어서 보내줘”
“알았어”
그리고 며칠이 흘렀는데 친구랑 찍은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안으로 학교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을 선택했다. 그나마 이게 얼굴도 작게 나왔고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엄마에게 사진을 건네주니 이건 뭐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편지. 편지에 넣어서 보내줘야지.
“그거 이미 보냈는데?”
“엥? 사진은”
“말이 없길래. 그때 그 잘 나온 사진 그거 넣어서 보냈지”
“오 마이 갓”
망했다. 답장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자기와 펜팔을 했던 한국에 남자 학생이 동생과 앉아서 좋다고 헤벌쭉하고 있는 사진을 본 나오코는 크게 실망하며 편지 쓸 맛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혹은 학교에 가져가서 ‘에 스고이’ 하면서 친구들과 내 흉을 보겠지. 종태랑 찍은 사진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씩 웃고 있는 게 멋이 있었는데 아 그걸 보냈으면 좋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뭐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일단 가장 사실적은 사진 하나 보낸 거고 그 다음번에 멋진 거 하나 보내서 상쇄하면 된다고 쿨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사실 나오코 사진도 그다지 예쁜 사진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쌤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로 나오코에게 편지가 오지 않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멋대로 오해하기 시작한 내가 더 이상 펜팔에 흥미를 잃고 편지를 보내지 않게 된 건지 정확하기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후자였던 것 같다. 왜냐면 그녀가 내 사진을 보고 ‘장난꾸러기 같다’며 아주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게 생각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더라도 그녀는 사진 속 나를 떠올릴 것이고 그건 절대 멋진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PC 통신이 우리 집에도 도입이 되었고 펜팔은 점차 뜸해지다가 결국 중단되었다. 사진 문제도 있었지만 영어의 한계로 더 속 깊은 공유가 어려워 서로 흥미를 잃었던 것도 원인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일본 진출을 도모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일본 활동 활약상을 티브이에서 자주 소개를 해 줬는데 나는 당연히 한국에서 종전의 히트를 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본에서도 거의 마이클 잭슨급 인기를 보여줄 거라 생각했고 마친 기사나 연예 리포터들도 ‘열도를 흔들다’와 같은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놓고 있던 터라 그대로 믿었다. 나오코와 펜팔에도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을 좋아하는데 너도 혹시 아니 일본에서도 유명할 텐데 하고 적어 보냈다. 답장을 받았는데 처음 들어 본다고 하며 일본 밴드를 몇 가지 적었다. 나 역시 모르는 그룹이었고(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 문화 개방 전이었다) 나는 크게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나오코가 시골 출신이라서 아직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일본에서 데뷔 앨범을 출시하는데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 그대로 앨범을 냈다. 요즘 가수들도 일본에서 앨범을 낼 때는 일본어 버전으로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일본의 정서와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의 인기를 믿고 밀고 나갔지만 성과는 미미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이미 팝과 록 음악처럼 다양한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그걸 흉내 내기에 바빴던 만큼(실제로 당시는 일본 음악을 표절한 한국 노래도 많았다) 문화적 차이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나오코의 문화적 소향에 다시 한번 실망하며(당시 나오코가 좋아한다고 했던 그룹은 B’z와 SMAP였다) 점차 펜팔에 흥미를 잃어갔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알면 내가 사진이랑 많이 보내주려고 했는데 전부 모르는 그룹뿐이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오코와의 연락은 끊겼다. 아니 끊었다. 영어 작문에 대한 한계, 문화적 교감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망한 사진 덕분에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일본 진출도 생각만큼 성과를 만들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후로 그들이 일본에 진출을 했다거나 앨범을 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울트라맨이야’를 발매하고 나서 일본 후지록 페스티벌에 참여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도 딱히 어떤 화제를 만들지는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긍정의 의미를 찾아보자면 양국의 문화적 교류를 시도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큰 인연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좋은 이미지를 주고받았으니까 뭐 된 거다. 누구 이야기냐고? 서태지도 나도 둘 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