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이사 준비가 시작됐다.
명절 연휴, 난 베란다부터 안방까지 집 안을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없는 잡동사니를 비롯해 오래된 편지와 사진, 그리고 추억이 담긴 것들이 집 안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순간과 기억, 사연을 품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며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설레었고 뭉클했으며 행복했다.
내가 첼로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입학식이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품에 안고 나타난 여중생들은 강당 앞쪽에 자리를 잡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애국가, 축가, 그리고 교가까지 연주했다. 현악의 화려하고 고급지고 풍성한 소리는 큰 강당을 채웠고, 참석했던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도 한 몸에 받았다.
'현악부 신입부원을 모집합니다. 악기를 처음 배우는 친구들도 괜찮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악보만 볼 수 있으면 된다는 포스터의 문구를 보자마자 난 홀린 듯 음악실을 찾았고, 악기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엔 그냥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제일 큰 악기인 첼로를 선택했다. 종례 시간이 되면 난 운동화 끈을 동여맸고, 종이 치면 제일 먼저 교실을 탈출해 음악실로 뛰었다. 원하는 악기를 먼저 차지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그 경쟁을 이겨내면 맨 뒤에서 활을 긋는 동작 하나하나에 감정을 싣는 연습만 오래도록 반복했다.
'도-솔-레-라-'
내 몸만 한 악기를 가슴에 품고 앉아 활을 켤 때 들리는 웅장한 소리.
손가락으로 줄을 누르면 온몸으로 전달되는 울림.
난 첼로의 매력에 금세 빠져 들었다.
어느날 부턴가 개인 악기를 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졌지만 악기를 사달라 집에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나에게 개인 악기가 생겼던 것은 여름 방학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를 데리고 현악기를 만들어 수출하는 공장을 찾아가 좋은 첼로를 선물로 안겨주고, 점심도 사주었는데 난 그날 무얼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피아노가 우리 집에 들어왔던 날 보다 더 흥분했던 건 틀림없다.
그날 이후 내 몸의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며 졸업식 날까지 첼로를 어깨에 메고 매일 등하교를 했다.
"징~징" 활긋기만할 줄 알았던 나는 학교 행사는 물론 음악선생님의 결혼식 그리고 작은 음악회에서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며 나름 멋지게 사춘기를 보냈다.
중학교 때 나는 첼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우린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모든 걸 공유했다.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첼로와 멀어졌다. 언젠가 꼭 다시 연주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으나 덩치가 큰 첼로는 오랜시간 창고에 갇혀 지냈다. 망설였고 고민을 했지만 이젠 안녕을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첼로를 꺼내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당*마켓에 글을 올렸다.
'만 원에 판매합니다. 30년이 넘은 첼로입니다. 인테리용으로 사용하실 분이 가지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드림으로 나눌 수도 있었지만 첼로의 첫 번째 음을 냈던 순간, 설렘, 추억의 값으로 난 만 원을 책정했다.
글을 올리자마자 빠르게 연락이 왔다.
"제가 사겠습니다!"
아쉽기도 하고 서운하고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사 갈 집에서도 창고에서 지내다가 결국 폐기물 딱지를 붙이는 것보단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날 밤 첼로는 그 남자의 차에 실려 떠나갔다.
"이건 어디 첼로인가요? 첼로의 히스토리를 알고 싶습니다." 채팅 메시지가 들어왔다.
난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가 맞선남에 그녀에 대해 설명하듯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이 아이는요 공장 본사에 가서 직접 데리고 왔어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연습용이자 연주용으로 사용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크랙도 없고 지판도 깨끗하고 렉도 잘 보존되어 있더라고요. 여기저기 흠집이 멋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연주가 어렵지만 제가 조금씩 손을 본다면 연습용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브리지는 손 보았고 부속품에 녹이 많아 새로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도 좋은데 이미 수명을 다해서 크라운으로 세팅을 하려 합니다."
이번 주인을 제대로 만난 듯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반갑고 고맙다.
난 그렇게 첼로와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안녕, 첼로!
네 덕에 정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