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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시언니 Oct 26. 2019

오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두시에는 좀 자요. 오빠.(1)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첫 눈이 내렸다. 그리고 그 눈이 소복하게 쌓인 다음날 아침, 그의 옆에서 잠이 깼다. 알몸으로 까만 양말만 신고 있던 나는 어리둥절해 했고, 그는 그런 나를 꼬옥 끌어안고 말했다. 

“가지마.”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애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관계로,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면서.
섹스를 위해 사귄 잠깐의 시간을 보낸 이후 ‘헤어진 연인’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늦은 밤이면 여전히 술 마신 그에게 연락이 온다. 그걸 알면서도 그리움에 못 이긴 나는 전화를 받고. 유독 외로운 밤엔 손가락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다가 잘 지내냐는 문자를 먼저 보내기도 한다. 새벽 두시만 되면 떠오르는 이 오빠의 매력은 도대체 뭘까?







< 오빠께 >


"자니?"







또 연락이 왔네요.

아니요 오빠, 저 안 자요.

오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오랜만에 만났던 하얀 겨울날을요.

오후 6시쯤이었는데 오빠는 아직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것 같았어요.


노란색 오리털 잠바를 입고 광장시장을 쿵쾅쿵쾅 앞서 걸어가던 오빠의 뒷모습이 기억나요.

베이지색 가르마를 사이에 두고 까만 머리가 양 갈래로 반듯하게 갈라져 있던 오빠의 뒤통수.

점퍼와 모자를 연결시킨 지퍼가 반쯤 벌어져 등 뒤로 흘러내린 노란 점퍼의 모자.

파란색 슈퍼마리오 츄리닝 바지의 무릎이 나온 건 왜 뒤에서도 보일까요.

전 ‘절대’ 창피하지 않았어요. 오빠의 뒷모습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미니언즈 같았어요.

여전히 귀여운 오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하고 촉촉한 생각마저 했는걸요.  




그래도 바지는 청바지가 낫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래, 그 블랙 슬랙스도 괜찮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정신을 차려보니 귀여운 미니언즈와 돼지곱창 집에 마주 앉아 있었어요.









글/그림 : 두시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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