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는 결핍과 애정에서 나온다
내가 삼남매를 만난 건 약 15년 전이다. 그 아이들이 처음 나와 만났을 때는 각각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7살이었는데 결국 모든 아이들은 고3이 될 때까지 나와 수업을 했다. 섬세하고 꼼꼼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큰 아들, 머리가 좋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둘째 아들, 몸이 약하고 예민하지만 그만큼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막내 딸까지. 세 아이들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귀엽고 영특한 남매였다. 물론 지금까지 가르친 아이들 중 삼남매는 많았지만 유난히 이 아이들이 더욱 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부모님까지 다섯 식구가 방 두 칸짜리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한 칸은 부엌이나 다름없었으니,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은 미술을 하는 분이셔서, 늘 작업실에 나가 계셨는데 그걸로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이 동네 아이 몇 명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그 돈으로 삼남매 교육비를 충당하고 계셨다. 이곳은 그런 동네였다. 학원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수업을 선호하는 아이들은 아무리 없는 집이어도 과외를 받는, 그래서 그 과외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들이 부업을 시작하는.
큰 아들인 철이는 처음에 자기 집에서 수업하는 걸 마뜩찮아 하는 눈치였다. 우풍이 심한 낡은 주택이었는데, 겨울엔 전기장판 위에서 수업을 해도 손이 차가워서 글씨가 잘 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무로 만든 문들은 모두 조금씩 기울어지거나 이지러져 문을 여닫을 때 굉장히 뻑뻑하고 소리가 많이 났다. 철이는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나를 매우 의식했는데, 그건 소리 나는 문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불편함을 느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닥 유복하게 자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에는 이미 익숙한 터였다. 한번은 그 집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오는데,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화장실 문 한 번에 연 사람,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그래서일까, 철이는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제일 큰 꿈이었고 우선은 좋은 대학 가기가 1차 목표였다. 결핍은 우리의 의지를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나 역시 반지하에 살면서 눌 꿈꾸곤 했으니 말이다. 아침이 와도 쪽빛만 간신히 들어오는 방에서 눈을 뜨며 커다란 창 가득 햇빛이 들어오는 방을 꿈꿨다. 집 안에 들어설 때마다 나를 맞이하는 퀘퀘한 냄새를 뒤집어쓰며 곰팡이 없는 집을 떠올렸다. 그래서 얼굴선이 가늘고 하얗게 생긴 철이는, 한 눈에 보기에도 빼빼 말라서 공부 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내가 지금껏 수업을 한 그 누구보다도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건 둘째와 셋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하는 중간 중간 몇 시인지 묻거나, 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책을 덮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이 삼 남매는 그날 수업한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때까지 시간을 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시간을 조금 넘겨, 내가 뒷 수업 때문에 허둥지둥 나가기라도 하면 문자로라도 질문을 보내고 답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배움에 대한 열의, 간절함, 절박함. 이건 독하다는 표현과는 사뭇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하나라도 더 나에게서 뜯어내고자 잔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싶고 배우고 싶어하는 의지가 그대로 전해졌다. 사실 의지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억지로 잡아 끄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고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조금만 던져줘도 냉큼 받아 먹고, 받아 먹은 게 하나여도 그것 이상의 결과물을 내 놓으니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삼 남매는 15년 전과 같은 금액의 수업료를 받는 유일한 학생들이었다. 수업을 하고 나서 집을 나설 때마다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분이니, 도리어 돈을 내야 할 판이었다.
반면, 혁이네 삼남매는 결이 사뭇 달랐다. 혁이네는 목동에서 제일 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잘 사는 전문직 주인공이 사는 집으로 종종 등장하는 이 곳은 매우 넓은 평수와 앙드레 김이 직접 디자인을 했다는 고급스런 내부 장식으로 유명했다. 이곳은 집에 들어서면 큰 거실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쪽은 아이들 방, 왼쪽은 어른들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운데의 거실이 너무 넓어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분리돼 있다는 느낌이 드는 집이었다. 집에 들어서면 늘 세 아이들만 나를 맞이했기 떄문에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 도중,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집에 계시니?”
내가 물어보자 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는 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 집에서 수업을 하는 5년 동안 어머님을 본 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철저히 분리된 공간만큼이나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활 역시 분리된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방이 붙어 있는 만큼 아이들끼리 짜고 엄마를 속이는 일도 가능했고, 아이들 중 한 명이 들어오지 않아도 엄마는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왔는지 확인하는 일마저도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당연히 어머님은 안방에 계신 상태였기 때문에 집안에 서로가 있음에도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 행태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내가 수업을 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 온 줄 알고 어머님이 부랴부랴 연락하신 적도 있다. 그만큼 아이들과 어른들은 소통 불가 상태였다.
처음엔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바깥 시내가 훤히 보이는 베란다 뷰에 감탄했지만, 어느 덧 그 집은 나에게 차가운 이미지로 변모해갔다. 엄마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버려진 아이들의 공간을 보는 듯한 느낌. 배가 고픈데 집에 밥이 없다면서 부순 라면을 먹고 있는 삼남매를 데리고 밖에 나가 밥을 사 준 적도 있다. 엄마는 어디 가셨니, 라고 물어도 제대로 아는 아이들이 없었다. 밥을 사 먹으라고 주신 건지 식탁 위에는 5만원짜리 지폐가 한 장 놓여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지 않았다. 배달 음식이 너무 지겹다고 했다. 그 큰 집에서 모여 있는 가족은 늘 삼남매뿐이었다. 아이들의 공허한 마음을 부모는 돈으로만 채워주는 듯 했다. 그래서 이 집 장남인 혁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그저 엄마가 자기들의 공간에 오기 전까지 게임이나 실컷 하는 것이었다. 혁이에겐 꿈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공부 의지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철이네는 방이 두 개뿐이었으므로, 남매 중 한 명을 수업하고 있으면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부엌으로 쓰는 옆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곤 했다. 처음엔 식구들이 달리 갈 데가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집에서 수업을 하는 게 조금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삼남매의 가족은 수업이 없을 때도 늘 한 공간에 모여 생활하는 것이 익숙한 듯 했다.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고구마를 까 먹으며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고, 앉은뱅이 책상을 두고 머리를 맞댄 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각자 책을 읽다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누군가 말을 할 때 늘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가족들은 그 작은 공간에서 늘 함께였다. 그러나 다섯 명이 머리를 모으고 앉아 있어도 그 공간이 비좁거나 답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가족들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기류 덕분이었으리라.
“선생님, 이것 좀 잡숴 보세요. 갓 구워서 따끈따끈해요.”
수업이 끝나고 나올 때마다 이제 막 김이 폴폴 올라오는 고구나마 감자, 옥수수를 내밀며 환하게 웃던 삼남매의 어머니. 호호 불면서 껍질을 하나하나 까서 내게 내밀던 그 투박한 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손으로 그린 그림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 손으로 키워낸 아이들이니 곱고 예쁠 수밖에. 넓은 집에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무심하고, 돈으로만 해결하던 혁이네보다 철이네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이 웃었다. 돈이 많지 않아도 마음이 넉넉하고, 서로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만큼 내적으로도 친밀한 사이. 그 모습을 보면서 좁은 집에 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들이 불편하다고 투덜대는 때도 있었지만 그뿐이었으니까.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때를 쓰거나,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는 없었다. 부모님이 늘 성실하게 삶을 꾸려 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알고 있기에, 기꺼이 현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철이가 장학금을 받아서 아낀 등록금으로 막내 학원비를 댔어요.”
철이가 대학교에 합격한 후 첫 장학금을 타자마자, 막내 여동생의 미술 공부를 위해 모아 두었던 돈 전부를 기꺼이 내놓았다. 철이가 입버릇처럼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가족들 때문이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가족들의 웃음 소리를 오래오래 지켜주고, 그들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더 절실하게 공부에 매달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쩌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장남 장녀의 숙명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부모님의 용돈과 동생의 학원비를 대고, 내 등록금까지 해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난 20%의 애정과 80%의 의무감으로 행한 것이었기에 철이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80%의 의무감만큼이나 큰 원망도 꼬리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철이의 이 말이 더욱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장학금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니까요. 막내가 예고에 들어 가려면 미술 학원 다녀야 되거든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목표 의식을 갖고 절박하게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부모를 탓하고, 이 정도밖에 지원해 주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남 탓을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설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철이네의 경우는 부모가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안에서 가족들 간의 유대가 단단했기 때문에 긍정적 결과가 가능했다. 철이네와 혁이네를 생각해 보면, 집이 얼마나 좋은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가족이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내는가’이다. 서로를 내어줌으로써, 서로를 채우는 가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