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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들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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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Jan 23. 2022

아주 사소한 예의 (2)

우리는 모두 아이들의 거울이다

“자, 선생님 용돈!”


요즘은 대부분 계좌를 통해 수업료를 지불하거나 카드로 결제를 하지만 예전에는 꼬박꼬박 현금을, 그것도 봉투에 담아 정성스럽게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봉투 겉면에는 ‘국어 논술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거나 ‘늘 감사합니다’와 같은, 마음이 담긴 문장 한 두 개도 적혀 있어서 수업료를 받으며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은 적도 많다. 일개 사교육 선생님인 내가 매우 귀한 스승님의 대접을 받은 기분이랄까, 뭔가 대우 받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어머님들 중에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어머님들께 직접 봉투를 받는 일은 적어졌다. 그때부터 계좌로 주시는 분들이 많아졌는데, 경우에 따라 아이를 통해 전달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영이네 집에 갔을 때였다. 영이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아는 것도 많고, 또래에 비해 잡학다식한 편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나에게 기싸움을 많이 걸어왔다.


“쌤, 이런 거 알아요?”


고 나이 때쯤 되면 자기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느껴지는지 “어른들이라도 요건 모르겠지? 이건 나보다 모를 거야.”라는 심정으로 떠 보듯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의 해결책은 별 것 없다. 내가 아는 것을 그저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기 싸움을 몇 번 하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수그러들고 겸손한 태도가 된다. 영이도 한창 그렇게 나와 기 싸움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수업료를 납부해야 하는 때가 되었는데 영이는 봉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거 쌤 용돈!”


어머님이 선생님께 전해 드리라고 아이에게 당부를 하고 가셨던 것 같은데, 마치 자기 부모님이 주시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주는 돈인 느낌이었나 보다. 심지어


“이건 수고비로 제가 만 원 뺄게요.” 라며 정말로 돈을 빼려는 시늉을 하는 것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애한테까지 이런 대우를 받으며 일해야 하나 아주 잠깐, 회의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고 날뛰는 치기 어린 아이의 말이니 그걸로 내 직업에 회의까지 느낄 필요는 없을 듯 했다. 다만,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는 용서해도 버릇없는 아이는 못 참기 때문에 그 말투와 태도에 대해서는 엄청 혼을 내고 어머님께도 말씀드렸다.


태도가 글러먹은 아이는 공부를 잘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을 눈 아래로 보면서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에 지식을 전부 쓰는 인재는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영이는 당시의 자신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는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났다. 늦게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지하고 성찰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마저도 안 되는 아이들이 많은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수업료 낼 돈은 없어도 TV 살 돈은 있다?


아이들이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엄마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사교육비일 것이다. 사실, 굳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각종 예체능에, 영어 학원이나 영어 유치원, 놀이학교까지 보내게 되면 한 달에 100만원은 훌쩍 넘는 돈이 교육비라는 명목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중, 고등학생이면 몰라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의 경우, 그렇게 수업료가 비싼 편은 아니다. 게다가 팀별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 과외비의 수준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료를 내지 않는 분들은 왕왕 있다.


물론, 그게 고의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이들이 워낙 많은 학원을 다니다 보니 어머님들이 정신이 없으셔서, 수업료를 냈는지  냈는지 일일이 기억을 못하시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사업을 하시는 경우는  들어오는 날이 일정치 않아, 어머님께서 미리 양해를 구하고  달에  번씩이나, 횟수와 상관없이 매달 정해진 날짜에만 납부하시는 경우도 있다.  나도  내야  곳이 여기저기 많고,   날짜는 다가오는데 수업료가 들어오지 않았을  불안한 마음은 있지만 미리 말씀을 주셨으니 얼마든지 기다릴  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주시겠다고 약속한 날짜는  지키신다. 런데도 어머님들은 매번 밀린 수업료를 주시면서 굉장히 죄송해 하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받을 돈을 기다리는 나보다 돈을 주셔야 하는 어머님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지 짐작이 되어 받으면서도 송구스러운 마음이  때가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러 수업료 납부를 미루시는 분들도 있다. 요즘은 수업료가 들어와야  날짜가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일단 문자로 수업료 납부 시기가 되었음을 알린다. 그럼 대체로는 바로바로 돈을 보내주시지만 미루시는 분들은 응답만 하고 돈을 보내지 않으신다. 2주가 지날 즈음,  다시 일괄적으로 문자를 보내는데 이때 응답이 없다면 뭔가 징조를 보인 것이라   있다. 그럼  주까지만 수업을 하고 마무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려야 한다.  그러면 수업료를 떼먹히는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만다.


내가 20대였을 땐 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임에도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왠지 꺼림칙해서 돈 얘기를 못하고 혼자서만 속앓이를 했던 적이 많았다. 최고로 오랫동안 수업료를 받지 못했던 시기는 7개월 가량이었는데, 그것도 쌍둥이의 수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거의 2배에 해당하는 돈을 받지 못한 채 수업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때는 돈을 보내지 않으면서 연락도 안 되고, 그러나 매주 꼬박꼬박 아이들은 수업에 보내는 어머님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었다. 순진하게도 정말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건 아닌가 싶어, 아이들이 올 때마다 표정이나 옷차림 등을 유심히 살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아이들은 늘 예쁜 스타킹과 레이스 치마, 그리고 비싼 가방을 메고 왔었다. 수업 받겠다고 들어서는 아이들을 매몰차게 돌려보낼 깡도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수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단단히 호구잡혔던 게 분명했다. 결국 그 쌍둥이들은 7개월 째에 최후통첩을 날리면서 마무리가 되었는데 그동안에도 난 그 어머님께 단 한 마디의 사과나 그동안의 사정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로부터 5개월 후, 다시 쌍둥이의 수업을 부탁하는 엄마의 문자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토록 전화와 문자를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던 분이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한 것을 보면, 당시 어렸던 내가 정말 만만해 보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말썽꾸러기 중2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 어머님은 늘 일주일씩 늦게 수업료를 주시더니 언젠가부터는 한 달이 다 돼가도록 수업료를 안 주시는 거였다. 오늘은 말씀드려야겠다, 마음 먹고 학생의 집에 딱 들어섰는데, 어머님은 날 보자마자 거실로 끌고 가셨다.


“선생님! 저희 집에 뭐 달라진 거 안 느껴지세요?”


보니까 그 집에 처음 들어온 사람도 한 눈에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텔레비전이 거실 중앙에 떡, 하니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 바꾸셨냐고 했더니 어머님은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본인이 염원하던 텔레비전을 이제야 들여놓게 됐다고, 냉장고도 함께 바꾸려다가 아버님이 말리셔서 그건 꾹 참았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님, 수업료 밀린 건 알고 계신가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키면서 나는 축하드린다는 인사치레와 함께 감정을 하나도 싣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업료 낼 돈은 없으면서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바꿀 돈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어머님은 아이들 수업료를 비롯해서 꼭 돈이 나가야 하는 곳에 돈을 쓰고, 남은 돈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쓰고 싶은 곳에 모두 쓰고 나서 남은 돈으로 수업료를 해결하시는 분인 듯 했다. 그땐 어리기도 했고, 어머님의 호들갑스러움에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가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수업하러 온 선생을 끌고 거실에 들어가서 새로 들인 가전을 자랑하던 그 어머님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각각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부모를 통해 배우는 것도 상당히 많다. 그러니 아이와 자주 만나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대할 때부터 우리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약속한 시간을, 자기 개인의 필요에 따라 급하게 바꾸거나 취소하고 거짓말로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당연히 비슷한 모습을 배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에게 지불하는 돈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아이의 ‘수업’을 위한 것이므로 아이에 대한 투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돈을 아끼거나 어떻게든 떼어 먹을 생각을 하는 부모라면 대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기도 하다. 아무리 돈으로 이어진 관계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바탕에 ‘신뢰’라는 것을 깔고 움직이는 ‘보따리 장수’들이기에 우리에 대해 이 정도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골수를 빼먹으려고만 하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씁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부모와 달리 아이들이 너무 반듯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강할수록 그 씁쓸함은 배가 되는 듯하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 이라는 뻔한 말이 설득력을 많이 잃은 요즘이기는 하지만 우리 아이는 어떤 거울을 보며 자라나고 있는지 한번쯤은 되돌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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