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아이들 07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림 Jun 21. 2023

장우의 수다

- 선생님이 대답을 제일 잘 해 주세요

수다쟁이 장우는 시시콜콜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매 수업 시간마다 나에게 이야기 해준다. 제일 처음 수업했던 날엔, 내가 낯설어서였는지 통통한 입술을 움찔움찔 하면서도 입을 잘 못 떼더니 한 번 입이 터지고 나니 걷잡을 수가 없다.


사촌 동생과 했던 게임에서 이긴 이야기, 사촌 동생이 할머니에게 울며 떼를 써서 시끄러웠다는 이야기, 엄마가 자기를 버려 두고 갔을 때 사촌 동생과 놀았다는 이야기 등등. 대부분은 사촌 동생과 보낸 시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주 귀찮아 죽겠어요!"


짐짓 정말 싫은 것처럼 말하지만 슬몃슬몃 얼굴에 비치는 미소를 보면, 누구나 이야기 속 주인공인 사촌동생에 대한 장우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과장이 섞인 내용들이 많아서 내가 반응을 좀 덜 보여야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난 주어진 시간이 한정돼 있었고, 나가야 할 진도가 있기 때문에 장우를 무한정 떠들게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 대답은 성의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어제는 아빠를 팔씨름에서 이겼어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난 아이고, 또 시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우는 유난히 아빠 이야기를 할 때 과장이 심하다. 역시나 그 다음은 아빠를 때려서 숨을 못 쉬게 했다는 이야기, 자기가 학교에서 싸움 1위를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장우는 쉴 새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떠들어댔다.


원래는 그 시간에 장우가 책을 읽고, 나는 신우가 풀어온 워크북을 점검해 줘야 했기 때문에 난 신우의 숙제를 채점하면서 "정말?" "아이고, 응, 그랬구나" "아빠를 떄리면 안 되지" 등의 말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내뱉고 있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신우가 한 마디 한다.


"와, 영혼 1도 없다! 완전 건성이네요, 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속을 들킨 게 민망해져서는


"아니야, 선생님 다 듣고 있었어. 들으면서 채점한 거지."


하면서 장우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장우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대답 제일 잘 해 주세요. 우리 엄마는 대답도 안 해요."


말을 마치고는 다시 오동통한 손으로 연필을 다잡고 글을 쓰는 장우를 건너다 보는데, 난 조금 먹먹해지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싸움 1위라고 했지만, 그 누구도 때려 본 적 없을 것 같은 폭신한 주먹을 가진 장우. 아빠를 때려서 숨도 못 쉬게 했다고 하지만, 아빠한테 맞아 이따금 멍이 들어 오는 장우. 사촌 동생이 아주 귀찮아 죽겠다고 말 하지만, 그 누구보다 사촌동생과 보내는 시간이 많은 다정한 형 장우. 언제나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이가 없는 듯한 장우.


그동안 아이는 얼마나 많은 어른들에게 그 얘길 해 왔고, 얼마나 많은 침묵과 함께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사촌동생들과 장우를 모두 보살피느라 바쁘셔서 장우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시간이 없으신 것 같았고 엄마는 늘 바깥 활동을 하느라 장우랑 함께 하지 못하셨다. 아빠는 주말마다 만나는 것 같았지만 장우 말에 의하면 늘 소파와 한 몸인 분이었다. 그 사이에서 장우는 누구에게라도 쉼없이 떠들었을 테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무성의했던, 건성인 듯한 대답이 장우에겐 “제일 잘 해 준” 것이 되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장우에게 좋은 선생이었던가.

내가 그렇게 장우에게 좋은 어른이었던가.

내가 그렇게 장우에게 좋은 청자였던가.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난, 그렇게 후한 평가를 들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장우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결국 그날 장우는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묵묵히 걸어갔다. 몸집만큼이나 큰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걷는 장우의 뒷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장우야, 다음에 또 이야기 해 줘!"


이건 진심이었다. 내 성의가 가득 담긴, 진짜 진짜 진심이었다.  


이전 06화 부모의 고학력은 아이에게 날개인가, 족쇄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