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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들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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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Feb 03. 2022

부모의 고학력은 아이에게 날개인가, 족쇄인가

재력보다 재능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중학교 시절, 나는 그즈음 막 생겨나던 대형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학원에 들어갈 때부터 외고반, 과학고반에 배정 받아 특목고를 향한 고급 교육을 받던 아이들. 엄마는 동네 보습학원 하나 다니면서도 전교 등수를 유지하는 나에게 비싼 학원이 무슨 소용이냐며 은근히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곤 하셨지만 나에게 그 말은 여우의 신포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가지 않아도 되어서, 가 아니라 갈 수 없어서 단념하는 씁쓸한 자기 합리화. 어머님이 대학 교수였던 내 친구는 경제적 상황이 꽤나 좋았던 덕에 과목별로 과외를 받고 있었는데,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 집어준 문제가 시험에 또 나왔다며 친구가 좋아할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의 가난을 원망했다. 적어도 자식이 원하는 건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꾹꾹 안쪽으로 눌러 삼키며, 성실히 공부하고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까봐 늘 불안해했다.


그러다 막상 내가 사교육 시장에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자식에 대한 부모의 투자가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가 온갖 돈을 쏟아 부어도 ‘될놈될’의 진리는 변함이 없었고, 안 되는 놈에겐 그것이 마음의 빚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래 아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의지에, 부모의 경제력까지 더해져 날개를 달고 죽죽 상승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어 끝없이 침잠하는 아이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섭이는 대치동의 유명 남자 고등학교에 다니는 전형적인 문과 남학생이었다. ‘전형적인 문과’라고 했던 이유는 하얀 피부에, 커다란 안경, 언제나 반듯하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 스타일이 교실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문과 모범생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성격도 그런 외모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과묵한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말수가 많지 않았고 이따금 축구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딱히 취미생활이랄 것도 없었다. 유럽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이 그 아이의 가장 큰 낙이었는데 때마침 아이가 고1 무렵이었을 때, 월드컵이 한창이어서 새벽까지 축구 경기를 보느라 눈이 벌게진 채로 나를 맞이하곤 했다. 유일하게 숙제를 하지 않은 것도 그때뿐이었다. 고3이 될 때까지 숙제를 못 해 오거나 미룬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아이는 성실했다.


그러나 섭이의 학습 성실도는 목표 의식이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섭이는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재밌어 보이는 직업도 없다고 했다.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니까 주어진 것을 묵묵히 해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섭이를 보면서 목표의식이 없이도 사람이 대단히 계획적이고 성실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건 오래된 습관과도 같았는데, 공부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하루 종일 축구만 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그게 아이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러던 섭이에게도 드디어 고2 말 무렵, 특정 학교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바로 고려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아이들 대부분은 고려대보다는 연세대를 희망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난 조금 의아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긴 하지만, 아이들은 일단 ‘고려대’라고 하면 왠지 시큼한 막걸리 냄새와 담배에 찌든 퀴퀴한 냄새 따위가 떠오른다고 했다. 학교 위치마저도 뭔가 시골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안암역. 아이들은 넓은 밭을 한참 걸어야 학교가 있을 것 같다는 소리들을 했다. 반면 연세대는 서울 시내 한복판을 도는 2호선 라인에 위치해 있었고, 홍대, 이대 등과 함께 넓은 대학가 중심에 있는 학교였다. 연세대 오빠들이 고려대 오빠들보다 더 세련되고 잘 생겼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아이들이 꿈꾸는 진정한 대학 캠퍼스의 낭만이 있는 곳, 그런 이미지가 바로 연세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섭이는 고려대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무척이나 확고했다. 그 이유는 섭이 아버님이 고려대를 나오셨기 때문이었다.


섭이 아버님은 국내의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계셨다. 섭이는 어머니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인 반면, 아버지와는 별달리 교류가 없어 보였는데 으레 그렇듯 나는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 말수가 적은 아버지 사이의 어려움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섭이 아버님은 딱히 엄하거나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셨고, 오히려 일이 너무 바쁜 탓에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칠 시간조차 많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굉장히 다정하고 살뜰한 편이어서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더 무뚝뚝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섭이는 그런 데면데면한 아버지 때문에 무조건 고려대에 가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등록금’이었다. 고려대는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고려대에 다니게 되는 경우, 등록금 혜택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섭이네는 등록금 혜택을 목표로 삼아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대외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아이가 고려대를 원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아버지 자체였다. 자신이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기 때문에 적어도 그만큼은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강단있고 야무지기보단 뭔가 물렁하고 유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섭이는 그닥 뒤떨어지는 아이는 아니었다. 타 지역 학교를 다녔다면 오히려 눈에 띄는 아이였을 수도 있었다. 특유의 성실성과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모범적인 모습, 그리고 큰 기복없이 늘 꾸준한 태도는 어딜 가나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낙 학교에는 날고 기는 아이들이 많았고, 늘상 친척들과 교회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 아버지로 인해 아이는 이미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그래서 섭이는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이 고려대를 들어감으로써 늘 아버지와 비교되며 사람들의 관심 한 켠에 밀려 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다. 아니, 고려대에 들어가면 그럴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한 믿음은 꽤나 강력하고 절박한 것이었다.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때마다 아이가 하는 말이었는데, 그런 날이면 아이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지 도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기 바빴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 썼지만 아이를 짓누르는 것은 아버지의 이력이었다. 고대 법학과를 높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 이후 대형 로펌에 들어가기까지 단 한 번의 정체기 없이 늘 승승장구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음에도 아버지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아이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가족과 비교하며 괴로워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결코 아버지와 같은 인간이 아님에도 섭이는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걱정 마, 니 아빠 자식이잖냐. 적어도 고대는 가겠지.”


섭이가 친척집에 가면, 늘 듣던 말이라고 했다. 아빠가 고려대를 나왔으니, 그 자식도 당연히 고려대에 갈 거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모든 대학은 세습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렇듯, 친척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논리에 가까운 발언들을 가볍게 던질 때마다 섭이는 그 무논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자기 자신조차 ‘적어도 고려대는’이라는 부분에서 설득을 당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갔으니, 당연히 나도. 그러나 그것은 섭이에게 동력이 되었다기보다는 늘 발목을 죄어오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욱이 역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욱이의 아버지는 부천에 있는 대형 성형외과 원장이었는데, 욱이에게 그것은 자부심이자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었다. 욱이의 부모님은, 욱이의 누나였던 큰 딸이 애저녁에 자신들과는 다른 머리를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간파하고 공부 쪽으로는 기대를 접었다. 대신 어릴 때부터 내로라 하는 선생들을 고용해 성악을 시켜서 실기 위주의 수시 전형을 이용했고, 유명 여대에 입학시키는 것까지 성공했다. 사실 아이를 성악가로 키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에 큰 딸의 교육은 나름 성공적인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욱이였다. 욱이도 역시 부모와 같은 머리를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딸에게와는 달리 욱이에게는 부모의 기대치가 있었다. 순전히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욱이를 맡게 된 것은 욱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됐을 즈음이었는데, 그때 나에게 욱이를 넘겨주었던 선생 말로는 욱이가 ‘만들어진 천재’라고 했다. 또래보다는 잘 하지만 그건 욱이가 잘해서가 아니라 엄청난 사교육의 투자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교육을 동원해도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난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 생각하고 아이를 맡았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만들어진 ‘천재’도 아니었고 만들어진 ‘범생이’일 뿐이었다. 수업을 듣는 태도와 임하는 자세만 좋을 뿐, 수업의 1부터 10까지 일일이 손수 떠먹여 줘야 하는 수준이었다. 가령 책을 읽는 것도 혼자 읽게 하면 절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입으로 읽어줘야 겨우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이어서 나는 욱이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스스로 끊어읽기를 전혀 하지 못해 수없이 설명을 해 줘도 반드시 내가 함께 읽어야 문제 해결이 가능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권에 묶은, 두께 6센티미터짜리의 책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줬다고 하면 알만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욱이에게 부모가 기대하는 것은 아버지와 같이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건 그 누구보다 욱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고3 무렵, 욱이는 아예 학교를 나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 가는 시간이 아까워 늘 병가를 내고는 오전부터 종일 과외 수업을 받았다. 고액을 받는 수학 과외 선생은 일주일에 4번씩, 매일 2번 욱이네 집에 왔는데 그 선생이 한 달에 욱이네서 받아가는 돈만 해도 4백만 원이 넘었다. 그렇게까지 수학에 공을 들인 이유는 의대에 가기 위해서였지만 성적은 도통 오르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욱이는 늘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해야 한대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보다 못하게 살 순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의대를 고집하는지 물었을 때, 욱이가 했던 대답이었다. 사실 의대가 아니라 공대나, 경영학과에 들어가는 정도라면 무리가 없는 성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과에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욱이의 생각은 확고했다. 본인이 그 생활을 누려 봤고, 행복했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지 못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우리 때는 과외고 뭐고 없었어! 다 혼자서 공부했지. 그런데 너는 과외 선생을 몇이나 붙여주는데도 이 모양이야!”


슬프게도,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한 욱이의 아버지는 그런 욱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교육에 투자를 해 주는데 왜 성적을 올리지 못하느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아버지 세대와는 입시 현실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하신 분들은 으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의 수를 받아들이지 못하신다.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깊게 뿌리박혀 있던 욱이 아버지는 욱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결과가 안 나오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욱이에게는 한계치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욱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날마다 과외 선생님들과 아침 저녁으로 만나며 공부에만 몰두하는데도 불구하고 수학의 벽을 넘지 못하는 욱이가, 아버지 눈에는 답답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가진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것부터가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아버지는 그 역할을 조금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아이의 능력치를 가늠해 볼 필요도 없이, ‘내 자식’이니까 당연히 자신과 비슷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부모가 고학력자에 높은 경제 수준을 지니고 있으면 당연히 아이들도 그만큼의 학력과 경제 수준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재력이 뒷받침되는 만큼 아이들의 교육에도 엄청나게 투자를 하니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도 많은 투자로 인해,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아웃풋을 낸 아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투자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 죄의식과 부담은 고스란히 자식의 몫이 되어 버린다. 어릴 땐 아무 생각이 없던 아이들도 커 가면서 그 무게를 피부로 실감한다. 게다가 부모들도 아낌없을 지원을 하면서 자연스레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해지고 만다.


그러나 부모와 아이는 엄연히 ‘다른 인간이다. 얼굴 생김새와 성격, 혈액형이 유사하다고 해서  같은 결과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서로 다른 역사를 갖고 있고, 각자의 시대에 통용되는 가치가 다르며, 따라서 태도와 생각도 다를  있다. 무엇보다 애초부터 갖고 있는 능력과 관심사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이러이러하니까 자식들도 당연히, 라는 1차원적인 기대는 아이가 원래 갖고 있던 능력치마저 야금야금 갉아먹고야 만다. 분명 엄청난 능력이 있음에도 부모의 경제적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아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아이들도 있지만, 부모가 지원해 준다고 해서 모두가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원과 기대에 짓밟히는 꿈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재력과 무관하게 아이들의 재능으로 꿈을 펼칠  있는 그런 사회가 오기를  소망한다. 재력보다 재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함을 알고,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는지를 따지기 전에 아이들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봐주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아이들 각자의 재능에 먼저 눈을 주는 어른이 되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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