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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들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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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Dec 21. 2021

문을 열어놓은 건 아이가 아니다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기 

14살인 민이는 낯을 가리는 법 없이, 처음 만난 사람 누구에게라도 곰살맞게 말을 하는 귀여운 중학생이었다. 민이에게는 1살짜리 늦둥이 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늦둥이를 보살피느라 늘 바빴다. 집안에 있다가도 아이를 데리고 나가곤 했는데 처음엔 아이가 시끄럽게 굴면, 수업에 방해가 될까봐 배려하시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수업을 하면서 그게 어머님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를 외출시킨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나가서 또래를 키우는 다른 엄마들과의 만남이 민이 어머님의 낙이었던 거다. 어쨌든 외출이 잦은 탓에 1층인 민이의 집은 늘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업 중에도 늘 택배 아저씨를 비롯한 경비 아저씨, 이웃집 아주머니 등등이 시시때때로 집안에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이집에 상주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나와 민이 둘만 있을 땐 내가 그 집을 지켜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생기기도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수업을 갔는데 웬일로 민이네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입구에 늘 보이던 막둥이의 유모차도 보이지 않았다. 벨을 누르고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민이가 문을 열어줬는데, 아이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방금까지도 울었던 건지 눈자위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보다 더 놀라웠던 건 민이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민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괴성을 지르며 옷장의 옷들을 죄다 꺼내 바닥에 패대기치고 있었다. 옷을 꺼내 뭘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옷을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옷은 북북 찢어 던져 버리고, 이빨로 물어 뜯기도 했으며,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는 시늉도 했다. 나를 의식해 문을 닫을 생각 따위는 이미 없어 보였다. 난 잠시, 내가 다시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우리 다음에, 수업할까?”


조심스레 물었더니 민이는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런데 자기 방이 아니라, 거의 창고처럼 쓰는 차가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민이의 원래 방도 여느 때와 달리 닫혀 있었다.  들어와서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는 아이. 심지어 눈물까지 뚝뚝 흘린다. 이미 수업할 분위기는 쫑난 것 같고, 아이의 하소연이나 들어주고 가자는 심정으로 무슨 일인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저 성폭행 당했어요.”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한 나의 귓가에 째지는 듯한 민이 엄마의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건은 전날 오후에 발생했다. 민이는 자신의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엄마는 여느 때처럼 막둥이와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한창 자고 있던 와중에, 잠결인 듯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그래서 엄마가 왔나, 생각하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힘으로 민이는 제압을 당하게 되었다. 상대는 민이가 덮고 자던 이불로 민이의 얼굴을 덮어 자신을 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게 만든 뒤 일을 저질렀다. 민이는 영문도 모른 채 우왁스러운 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불 속에서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푹신한 이불과 굳게 닫힌 현관문까지 뚫기엔 너무 미약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볼 일을 끝마치고는 상반신만 이불에 덮인 아이를 그대로 버려둔 채 유유히 그 집을 떠났다. 아이는 남자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민이를 짓누르고 있었던 건 그 사람의 무게였을까, 아니면 아이가 느꼈을 무력감이었을까?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던 집이, 자신의 방안이 가장 공포스럽고 추악한 곳으로 변해버린 거였다.


잠시 후, 현관문의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을 때 민이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런데 계속 에러음이 들리자,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고 했다. 혹시 그 남자가 다시 돌아온 것일까봐,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것일까봐 민이는 방밖을 나가지 못했다. 온갖 두려운 상상이 아이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관문 밖에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동안 쭉 현관문을 열어놓고 생활한 탓에 엄마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거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 현관문을 잠가 놨어, 번거롭게!”


민이는 그때부터 손이 벌벌 떨리고, 가만 있어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가 아니면 엄마에게 그 일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아이는 회상했다. 그래서 민이는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 짜가며 방금 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더듬더듬 말했다.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엄마와 자기뿐이라고 했다. 아파트 내에 CCTV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는데 그건 엄마와 자기 모두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아빠였다. 민이의 아빠는 큰 약국을 하는 약사였는데, 꽤 높은 지식 수준과 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남녀 차별 의식이 굉장히 심해서 민이가 과외를 받는 것도 못마땅해 하고,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며 늘 불만인 사람이었다. 아마 이 일을 알게 되면, 민이는 자기가 혼날 거라고 했다. 평소에 함부로 행동을 하고 빌미를 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고, 집안 망신을 시켰다는 원망을 들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막을 요량으로 아예 과외를 모두 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21세기에 도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에 뜨악했지만, 그걸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엄마와 민이가 더욱 놀라웠다.


“그래서 범인 잡는 건 포기한 거야? 그래서 엄마가 저렇게 화가 나신 거니?”  


내 질문에 아이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아뇨, 엄마는 저한테 화가 났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 아빠 이야기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엄마는 왜? 엄마가 민이에게 화가 난 이유를 물으니 아이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아마도 현관문을 잠가놓은 것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지금 엄연한 피해자이고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엄마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죄책감을 전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떠한 경각심이나 문제의식 없이 늘 현관문을 열어놓고 생활했던 본인에게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던 것인데 그 모든 책임을 아픈 아이에게 돌리는 것이 너무 비겁하고 무책임해 보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도 아닌, 바로 엄마가!


엄마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딸이 몹쓸 일을 당할 만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을. 자신의 무신경함이 아이에게 끔찍한 기억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런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해결할 길이 없어, 엉뚱하게도 그녀는 상처입어 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협박과 막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그 죄책감을 씻을 수는 없다. 아마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괴로움의 깊이가 더욱 커졌을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방에서 괴성을 지르고 자학하듯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는 동안에도 다친 곳을 보듬지 못한 아이가 방 한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있다는 거였다. 상처가 곪아 가는지도 모르고 외로이. 그 일을 당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에도 민이는 그곳이 자기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와야 했다. 결국 아이는 창고처럼 쓰던 다용도실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엄마는 아이에게 그 흔한 이불 한 장 갖다주지 않았다고 한다.




강동원과 이나영이 주연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도 비슷한 경우가 등장한다.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 괴로워하던 이나영은 울면서 이 사실을 엄마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엄마는 도리어 이나영의 뺨을 때리며, 도대체 행실을 어떻게 한 거냐고 채근한다. 아픈 기억을 간신히 꺼내, 믿었던 엄마에게 풀어냈는데 아무 것도 이해 받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을 당하던 때의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엔 그런 반응을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여기며, 이건 분명 영화라서 과장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은 민이는 뺨만 맞지 않았을 뿐 엄마에게 매일 폭력을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을 매일 보고, 그 소리를 매일 들어야 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이다.


우선은 엄마가 이성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아이와 엄마를 떨어뜨려 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일을 알고 있는 영어 선생님과 함께 짧은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마침 여름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여름 휴가라 생각하고 우리는 강원도 정선에 가기로 했다. 실은 방학이라는 이유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민이가 집에 있는 시간이 염려된 탓도 컸다. 민이 엄마도 아이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힘들었던지 우리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아이를 볼 때마다 그 엄마도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왕 결정한 일이라면 기분 좋게 보내주면 좋았을 것을, 그 엄마는 아이가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 엄마의 그런 모습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민이는 선뜻 집밖을 나서지 못하고 신발장 근처에서 계속 서성였다. 가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기 위해 아이의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는 민이에게서 아예 등을 돌리고 막둥이만 보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아이가 인사를 할 때도, “잘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라고 내가 말했을 때도 그 엄마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막둥이 밥을 먹이기 바빴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아 힘들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못해도 편지를 써서 전달할 수 있다. 아니면 말없이 안아주거나 눈을 맞춰 가며 ‘잘 다녀와’라고 한 마디 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대신에 민이 엄마가 택한 것은 외면과 방치였다. 아이가 아파하고 혼자 슬픔을 꾹꾹 눌러 참는 걸 외면하면서 마치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그 일의 중심에서 비껴 서려 했다. 그저 아이가 몸부림치는 것을 내버려둘 뿐이었다. 여행 도중에도 아이는 엄마에게 갖다 주고 싶다며 지역 특산물을 사고, 밤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 모든 일에서 엄마는 벗어나고, 잊고 싶은 것 같았다. 심지어 아이에게서조차도.




여행을 다녀온 뒤 한 달쯤 지나고 나서 난 더 이상 민이와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민이에게 일어난 그 일을 아는 선생님들을 모두 정리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수업을 정리하면서 민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건 더 이상 아이와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주변에 이야기가 퍼지지 않은 상태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만 정리하고 나면 마치 그 일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알고 있는 과거의 사람들과 인연을 끊는다고 해서 민이가 정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 엄마도 그걸 알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딸의 상처보다 자신의 감정과 주변의 시선이 더 중요한 엄마의 입장에선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민이와 인사를 하고 나오며 돌아보았을 때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늪 속에 아이를 혼자 버려두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늘 활짝 열려 있던 현관문 안쪽의 세상은 점점 곪아 썩어가면서 그 속에 깃든 여리고 작은 꽃송이 하나를 시들게 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 벌써 13년 정도가 흘렀고, 지금 민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주변에 자신을 걱정해 주던 어른들이 떠나갔다고 해서, 자기가 버려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라 하더라도, 그 엄마가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다가가 안아주었기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너의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었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늘 내 아이에게 죄책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 항상 일에 빠져 있느라 아이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아이와 오랜 시간을 보내주지 못한 것 때문이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심하면 심할수록 아이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면서 웃어주는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부채감 때문에 자학을 하거나 아이에게 책임 전가를 하진 않는다. 그건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다. 민이 엄마도 그 모든 상황에 대해 무지하고 무신경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그 동안 시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내 감정을 추스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금 가장 아파할 사람은 아이니까. 내 감정이 수습되고 나서 돌아보려 하면 이미 늦은 뒤일지 모르니까.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순간, 아이의 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은 늦었다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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