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 탄산수의 역사

by 정짜리

탄산수와의 첫 만남은 2008년 여름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던 언니를 만나러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간 독일. 도착해 언니가 데려간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가장 먼저 물어본 게 바로 'mineral water or sparkling water?'였다. 당시 탄산수가 뭔지 모르던 나는 미네랄워터, 언니는 스파클링 워터를 주문하고 언니는 웨이터가 가져다준 탄산수를 한번 먹어보라고 했다. 처음 마신 탄산수는 시원하지도 않았고, 느글거리면서 혀가 따끔따끔한 요상한 맛이었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먹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생 살아봐야 안다더니 요즘 나는 물 대신 탄산수를 들이켜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기내 음료 메뉴에도 탄산수가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소다 워터'로 이코노미 클래스에는 아주 소량만 탑재돼, 외국인 승객이나 소다워터를 아는 사람만 간혹 주문했다. 물론 비즈니스 클래스나 일등석에서는 식음료 가짓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페리에'가 탑재되었다. 최근에는 탄산수를 찾는 사람이 많아져 이코노미 클래스에도 탄산수가 콜라나 사이다만큼 많은 수량으로 탑재되고 있다.


탄산수가 비중이 커져 가장 좋은 건 승객보다 승무원이 아닐까 싶다. 대다수의 승무원은 탄산 중독이다. 원래는 나도 탄산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면서 콜라, 사이다에서 시작해 진저에일이나 토닉워터까지 기내에 실리는 모든 탄산을 다 섭렵하게 됐다. 왜 그런 걸까? 농부들이 먹는 새참 '막걸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힘든 농사일을 하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먹는, 농민들의 애환이 담긴 술 막걸리. 승무원에게 탄산은 그런 의미이다. 위로와 단합의 의미로 서로서로 챙겨주는 노동 음료. 기내에서의 힘든 중노동과 여러 승객을 대하며 겪는 스트레스, 이것들을 삼키게 하는 것이 바로 일하다 갤리에 잠깐 들어와 벌컥벌컥 마시는 탄산이다.


나만 해도 혼자 48인분의 식사가 담긴 카트를 끙끙거리고 끌고 나가 “식사는 소고기와 해산물이 준비되었습니다”를 48번 얘기할 때, 해산물이 먼저 소진 돼버리면 무릎을 꿇으며 소고기 메뉴를 승객께 사정할 때, 해산물이 아니면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손님을 위해 다른 존 카트에서 몰래 해산물을 빼 오다 선배에게 걸려서 눈치 보일 때마다 타는 목마름으로 당장 갤리로 뛰어 들어가 탄산을 들이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차가운 탄산이 목을 따갑게 때리며 식도를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스트레스도 쓸어내리는 그 느낌. 이 짜릿함으로 승무원들은 탄산 중독이 되곤 했다.


이러한 역사로 나 또한 탄산수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승무원을 그만둔 이후엔 일할 때와는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육아이다. 육아를 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아무리 컴플레인을 심하게 하는 사람도 나와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것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의 끊임없는 일상의 반복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또 그 상대에게 애정이 충만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육아 스트레스는 사실 탄산수로는 해소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 정도라면 맥주를 들이붓는 게 맞지만, 경험상 취해서 애를 보면 더 죽음이다. 그래서 결국은 다량의 탄산수로 합의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추천으로는 정말 죽겠다 싶을 때는 초정탄산수 캔이 맞고(입덧에도 좋다) 보통 때는 트레비 플레인 300ml 병이 딱 좋다. 사치 좀 부리고 싶거나 유럽 감성이 그리울 때면 산펠레그리노나 페리에도 괜찮다.


요즘은 아이가 말이 늘어가며 대화가 되기 시작해 육아 스트레스가 나아지나 싶었는데 그 빈자리를 남편이 채워주고 있다. 눈치는 보지만 눈치가 없는 남편. 아주 쓸데없는 것까지 늘 내게 묻는 남편. 아이와 함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남편. 이런 남편을 볼 때마다 속이 터져 어제는 시적 표현을 배우는 강의 시간에 울화라는 시를 한 편 썼다.


<울화>

울화가 치미는 소리

오. 빠.


대장내시경이 예약돼 있어 그 전날 4시까지 흰 죽이나 카스텔라 같은 것만 먹어야 한다고 병원에서 안내를 받았다. 분명 같이 들었는데 글쓰기 강의 듣는 나에게 전화해 뭘 먹어야 하냐고 묻는 남편에게 친절히 카스텔라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 조금 뒤 또 전화와 카스텔라는 몇 개 먹어야 하냐고 묻길래,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몇 개가 먹고 싶냐고 되물었다. 한두 개로는 배가 안 찬다길래 카스텔라 두 개와 우유를 함께 먹고 4시 이후로는 금식하라고 다시 말해줬다. 나는 훈련받은 프로 승무원이니까. 누구에게나 미소 짓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해온 사람이니까. 꾹 참고 상냥하게 말해보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남편은 쉽지 않은 상대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하루에 탄산수 300ml를 하루에 3~4병은 먹는다. 시적 표현을 배운 사람으로서 표현하자면 나에게 탄산수는 울화를 삭히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상징이다. 서비스직의 애환과 친절한 아내 & 상냥한 엄마가 되기 위한 발버둥을 담은 음료. 짧지만 긴 탄산수의 역사는 이렇게 흐르고 있다.


그래도 역시 맥주가 더 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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