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플레인, 어디까지 받아봤니

나만의 컴플레인 응대법 - 사귀내 기법.

by 정짜리

요즘같이 비가 오는 날엔 난 늘 무릎이 쑤신다. 웃픈 얘기지만 동료들과 농담 반+진담 반 했던 말로, 비행기에서 무릎으로 걸어 다녀서가 아닐까 싶다. 승무원이 되고 나서 하도 무릎 꿇고 승객 응대를 하다 보니 근육 하나 없는 얇디얇은 나의 학다리와 무릎은 버텨내질 못했다.

그래서 무릎은 잃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법은 얻었다. 특히 화를 내는 사람들을 응대하는 나만의 이론까지 생겼다. 바로 사귀내 기법.


1. 귀내 : 사과한다.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해보자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바로 사과의 말이 나오겠지만, 사실 내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고객이라는 이유로 사과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지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벙커에서 교대로 쉬는 휴식 시간이 끝나고 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 잠이 덜 깬 얼굴로 아일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젊은 여자 승객이 손을 들고 다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조금 전 작은 터뷸런스로 비행기가 흔들릴 때 컵에 있던 오렌지 주스가 쏟아져서였다.

“어머 손님, 괜찮으세요? 바로 치워드리겠습니다.” 젖은 담요를 치우고 서둘러 물티슈와 페이퍼 타월을 가져와 끈적이지 않도록 무릎까지 꿇은 채 좌석과 바닥을 열과 성을 다해 닦았다. 뽀송한 새 담요까지 깔아주며 “손님 더 불편하신 점 없으십니까?” 하는데 돌아온 손님의 대답은 “사무장 불러주세요.”였다.


what?! 사무장을 불러달라니... 내가 주스를 쏟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쏟은 주스를 이렇게 열심히 치웠건만 왜 사무장을 불러달라는 것인가. 황당하지만 내 잘못이 없으니 쫄지않고 사무장님께 보고했다. 한참을 승객과 얘기한 사무장님이 나에게 전한 말은 이거였다. 마신 주스컵을 승무원이 치워주지 않아 터뷸런스 때 주스가 쏟아져 자기가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을 최초로 목격한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은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아니 사과 한마디 없이 너무 열심히 치우기만 하잖아요. 옆에 사람들 보기 무안하게!”


이따금 승객들은 승무원에게 매뉴얼에서도 본 적 없는 차원 높은 서비스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과한다. 지금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그 승객은 자신에게 주스를 가져다주고 컵을 치우지 않은 담당 승무원을 찾아서 또 컴플레인을 하며 힘들게 할 것을 알기에.


2. 사내 : 귀를 기울인다.

화난 사람을 가장 빨리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순히 얘기를 듣는다는 느낌이 아니다. '나 엄청 집중하고 있어, 당신의 얘기 내가 다 듣고 수용할 거야, 당신 말 무슨 말인지 난 다 이해해' 하는 공손한 자세가 핵심이다. 사실 이렇게 귀만 열고 잘 들어도 대부분의 컴플레인은 넘어간다. 귀를 열고 듣는 자세 자체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뜻해서가 아닐까. 최근에 나도 시댁에서 한소리를 듣고 남편에게 울분을 쏟아낸 적이 있다. "당신 어머니는 도대체 왜 나한테!!!" 와다다 우당탕하는 그 소리에 남편은 의자에서 허리도 떼고 정자세로 앉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말 한마디 없이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어느새 나의 데시벨도 낮아지고 있었다. 컴플레인 중에 가장 빡세다는 와이프 바가지에도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먹히는 법이다.


3. 사귀 : 내려놓는다.

사귀내 이론의 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승무원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나를 내려놓는 것'을 잘해서이다. 글쓰기 수업 시간에 강사님은 내게 비행기 진상에 대해 글을 쓰면 재밌을 것 같다고 써보라고 했다. 물론 나의 직업윤리(?) 차원에서도 쓰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겪은 진상 고객들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비 올 때마다 쑤시는 무릎은 진상을 기억하고 있지만, 머리로는 잊어버렸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진상을 만나면 몇 날 며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객이 나에게 쏟아내는 감정을 오롯이 내가 짊어지면 진짜 내 삶까지 버텨낼 수가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일할 때는 유니폼 뒤에 나를 내려놓고 지극히 승무원으로만 고객을 대했다. 진정한 프로로 업그레이드된 순간이다. '귀를 기울이고, 잘못에 사과하고, 겪은 불편함은 처리하겠지만, 당신이 나에게 쏟아내는 분노는 거절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손님, 제가 다급한 마음에 주스를 치울 생각만 했지, 손님께 제대로 사과를 못 드렸네요. 진작에 컵을 치웠더라면 손님께서 이런 불편함을 겪지 않으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남은 비행 동안 더 신경 써서 불편하실 일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유니폼을 입은 나는 내 잘못이 1도 없는 컴플레인에도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사과가 손님에게 닿아 또 한 건의 컴플레인을 줄일 수만 있다면야, 나의 무릎쯤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비빔밥이 다 떨어졌습니다...흐흑흑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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