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에서 인터폰 체크하겠습니다. 이 비행기는 뉴욕까지 가는 OO항공 085편입니다. 레이디스 앤 젠틀먼, 디스 이즈 OOO에어 플라잇 줴로 에잇 퐈이브. 이상 있으면 R1으로 콜 주십시오.”
눈을 감아도 선한 장면이다. 비행기를 타면 제일 먼저 내가 했던 일.
수도 없이 많이 해서 몇 번을 했나 가늠하기도 어렵다. 방송 자격 A가 있던 나는 오랫동안 비행기에서 기내 방송을 했다. 지금도 툭 치면 반자동으로 기내 방송문이 줄줄 나올 정도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어언 2010년 초반...) 방송 자격 A를 따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방송 A를 따기 위해 방송 자격이 있는 팀 언니에게 졸라 호텔에서 과외를 받기도 하고, 오프 때마다 김포까지 힘든 몸을 끌고 가 녹음을 하고 오곤 했다. 그렇게 열 번 이상의 고배를 마신 후 따낸 힘들고 귀한 자격이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기내 방송 스킬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바로 '우R 을L'.
영어야 교과서 영어 > 수능 영어 > 토익 영어만 했지, 실제로 어학연수도 안 가본 내가 영어로 기내 방송을, 그것도 유창하게 해야 한다니...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창함 대신 유창해 보이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하기 시작한 게 바로 '우R 을L'이다. 알파벳 R과 L을 발음하기 전 입모양만 '우, 을'로 하고 시작해도 발음이 한결 유창해 보인다.
그런데 기내 방송의 시작이 바로 Ladies 아닌가! 원래 시작만 그럴싸해도 굉장히 방송을 잘하는 것 같아진다. 나는 방송 전 늘 입을 '을'로 장전하고 있다가 Ladies로 쐈다. 그럼 높은 확률로 과녁을 맞히곤 했다. 또 기내 방송문엔 유달리 R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았다. ready, remain, return. 어려운 R 발음도 자신감 있게 하니 긴 영어 방송도 막힘이 없었다. 원래 영어는 자신감과 기세로 하는 것이다. 유창함을 흉내 내는 나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두 번째는 바로 목소리의 톤이다.
보이스 자체가 중저음이라 방송 평가에서 톤이 낮다는 지적을 몇 번 들었다. 우리 회사가 지향하는 기내 방송은 산뜻하고 따뜻하며, 미소를 머문 다정한 톤이다. 그래서 톤이 낮다는 지적을 몇 번 들은 후 나는 방송할 때 도레미파 솔의 '솔 톤'으로 내 목소리를 맞췄다. 도레미파 솔솔 솔로 목소리를 끌어올린 후 바로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를 시작하곤 했다. 확실히 나는 방송을 잘했던 게 아니라 잘하는 척을 잘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솔 톤으로 기내 방송을 했고, 목소리가 너무 좋다며 승객에게 칭송을 받은 적도 있다. 이번 비행에서는 승무원의 따뜻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는 잊을 수 없는 칭송이었다. 나의 솔 톤 목소리는 비행뿐만 아니라 소개팅에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솔 톤 목소리로 소개팅을 나가면 애프터 승률이 거의 99%였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새벽 감성으로 정지영의 스윗박스를 들으며 감수성을 키워온 남편은 처음에 날 만나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비슷한 나에게 반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신혼 1년이 지나며 정지영 아나운서를 닮은 아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고... 연애 초반 듣던 솔 톤 목소리를 너무나 그리워해 한번은 술 먹고 들어와, 자던 나를 깨워 솔 톤 목소리 들려달라고 술주정을 해 내게 욕을 먹기도 했다. 나에게는 솔 톤이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맞는 목소리 톤을 찾는 것이 기내 방송이건 소개팅이건 결혼 생활이건, 어쨌든 중요하다.
며칠 전 외출 준비를 하며 카페에 들고 갈 텀블러를 고르다 오랜만에 비행할 때 들고 다니던 텀블러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뚜껑을 열자, 비행 전 인천공항 파리크라상에서 매일 담아가던 라떼 향이 났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어도 커피 향은 그대로구나 싶어 갑자기 조금 울컥했다. 비행과 함께 늘 들고 다니던 텀블러에서 여전히 라떼 향이 나는 것처럼 나에게도 아직 내가 일하던 기내가, 또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모습이, 비행마다 하던 기내 방송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번씩 입에서 맴도는 기내 방송을 중얼거릴 때마다 승무원으로 살았던 그때가 그리우면서 동시에 웃음이 지어진다. 매일매일 최선을 다 하며 살았던 그때의 내가 기특해서.
문득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페어웰 방송이 생각난다. 그때도 난 '솔 톤' 목소리에 입 모양은 '을'로 맞춘 채 방송을 시작했겠지.
“Ladies and Gentlemen, we have landed at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