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김작가 Jun 14. 2024

사물에 상처 주기

주로, 사물에 숨이라도 불어넣듯 하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역할을 하는 업사이클 아트 작가를 표명하는 내가 드로잉 시간에 제시한 주제가 사물에 상처주기라니.

내가 말하고도, 난 사물이 아닌데도 움찔하게 된다.


전시회를 마치고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수강생들이 다시 그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고심해야 했다. 또 뭘 그려야 하는지가 가장 고민이겠지. 테크닉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왜 그려야 하는지가 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본질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 거미줄 한 가닥이 끊어지면서 포획했던 관계가 해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많이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지리라는 것도 안다.


"오늘 수업은 사물에 상처 주기입니다."

수업시간 보다 일찍 온 에일린에게 처음 주제를 말했다. 말하자마자 멈칫하고는 서로 바라보다 울고 말았다. 사실 이 주제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서 수업할 땐 무심하게 말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다짐했었다. 그런데 유난히 감성적인 에일린이 바로 공감을 해버린다.

상처를 주자는데 왜 이렇게 우리가 슬픈 거냐고….

사물이나 대상 어느 것이든 무심히 상처를 내어 주세요. 피가 철철 나고 이런 거 말고 감정이입 없이 무심히 상처를 내어 주세요. 


에일린은 초를 켜 둔 유리 용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용기 아랫부분을 깨뜨리고 조각은 그 옆에 배치했다.

처음보단 덤덤히 상처를 내어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수업시간 전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키키가 창작소로 들어선다. 주제를 얘기해 주니 잠시 고민하고 바로 눈앞에 놓인 휴지를 쭉 찢어 상처를 낸 뒤 그려낸다. 이 그림을 본 뒤 휴지를 찢을 땐 비명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색연필로 간결하게 표현했는데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그림이다. 


함께 먹기 위한 빵을 들고 윤희와 통깨양이 들어섰는데 밝은 기운이 올라오기 전에 서둘러 주제를 말해서 그림을 시작하게 해야 했다. 이 둘은 워낙 에너지가 밝고 경쾌해서 오늘 같은 차분한 주제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무게를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고소한 빵을 썰어 내오는 순간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은 따뜻해지고 말았다. 즐겁자고 하는 일이니 어떻게 할 수는 없지. 먹으며 다시 그려보자고 재촉했다. 


윤희는 전시회 때 받았던 꽃이 꽂힌 화병을 오일파스텔로 그렸는데 시들어 가는 장미 한 송이를 그대로 묘사했다. 눈물처럼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부러 상처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였다면 떨어진 꽃잎은 신경도 안 쓰고 생생한 꽃잎을 더 싱그럽게 표현했을 그녀다. 


통깨양은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그렸다. 휴대폰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거기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깨졌다는 것만으로 일단 마음에 동요가 인다. 아플지 알면서도 이건 일부러 그녀가 만든 상처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시는 줄리가 맨 마지막으로 참여했다. 늦었지만 마음은 더 쓰인다. 늦게라도 오시려고 얼마나 애쓰셨을까 싶어서. 빵과 주스, 하루견과와 초콜릿을 드리며 주제를 전했다. 

줄리가 하루견과 봉지를 뜯어 아니 상처를 낸 뒤 그린다. 

저건 상처일까? 일단 급하게라도 필요에 의한 상처를 주고 시작한다.

줄리가 얼마 전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그렸을 때 이보다 큰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그림이라는 기록으로 남겼을 때 상처는 말을 건다.


저녁수업에 참여한 양형사는 꽃이 있는 화병에 기대어 웃고 있는 가면을 그렸고 이마에 총구멍을 냈다. 감정이입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평소 강해 보였던 그녀와 치명적인 상처가 극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 해도 내가 입힌 상처는 고스란히 내 것이 되고 만다.

사물에 상처를 내며 왜 우리는 마음이 그리도 아팠을까?








이전 28화 원은 못 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