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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Jun 10. 2024

시계가 죽었다

까뮈가 소설 이방인에서 첫 문장으로 쓴 '엄마가 죽었다'가 개연성 없이 떠오르는 바람에 첫 문장부터 길을 잃었다. 

죽어서야 만난 시계들은 이미 시계의 기능을 잃어버렸지만 시계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부르게 된다. 건전지를 넣거나 손을 조금 보면 죽은 척했던 것처럼 씩씩하게 째깍거릴지 모른다. 아니 내게 오기 전 이미 심폐소생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고도 가망이 없거나 디자인에 대한 실증으로 정리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시계가 죽은 것을 죽은 것처럼 생각하지는 말자. 

심지어 시계가 선 모습이 평화롭기까지 하지 않나.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태엽을 감아야 하는 밥 주는 시계가 고장이 나서 밥을 주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소생시키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전자식 심장을 달고 태어난 시계들은 무브먼트가 저렴하기도 하고 바늘의 위치만 조정해 줘도 살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수리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죽은 것은 죽었다고 생각하자. 

애쓰지 말자. 

흔하디 흔한 시계...


가냘프지만 정교한 느낌의 시곗바늘이 어떤 이유에선지 구부러져 있다. 강제로 어떤 시간을 가리키게라도 하고 싶었을까. 

그저 멈춘 바늘을 고쳐보겠다는 게 힘이 과했던 것이었겠지. 

세 남매를 둔 친구가 가져온 이 시계는 망가지기에 갖가지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버려한다는 결정이 난 후로 김작가를 떠올렸을 테고.

시계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가져온 친구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시곗바늘의 초침이 춤을 추듯 심하게도 구부러져서 손을 대기만 해도 부러져버릴 것 같다.

초침 없는 시계는 죽은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나도 그냥 버릴까?

그리고 

시계가 죽었다가 아닌 시계는 버려졌다로 쓰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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