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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May 26. 2024

<언제나 책봄>'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현실과 상상 사이 그 경계선을 넘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는 사실은 조금 두려우면서도 묘한 떨림을 안겨 준다. 딸아이와 서점에서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 그사이 신간이 참 많이도 쏟아졌다. 출간 작가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 서점 한 곳에서 내 이름 석자가 적힌 책이 전시돼 있는 걸 상상해 본다. 세상에 차고 넘친 게 글 잘 쓰는 사람들인데 나까지 동참해 자원 낭비만 하는 게 아닐까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다 오랜 꿈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많이 읽고, 사유하고, 되든 안 되는 키보드 앞에서 꾸준히 글을 쓰는 일. 미리 체념하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일. 남들은 대부분 잠이 든 밤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는 이유다. 제1회부터 지금 손에 쥔 15회까지 한 권도 빠지지 않고 읽었던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을 보며 출간 작가를 꿈꾼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베트남 다낭으로 가는 에어로K비행기 안에서.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흔들릴 수 있으니 안전수칙을 지켜달라는 기장의 멘트에 침을 한 번 꼴깍 삼킨다. 에버랜드의 T익스프레스가 덜컥거리며 서서히 올라갈 때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과 같은 울렁임을 느끼며 김멜라 작가의 '이응 이응'을 읽는다.

특이한 제목처럼 책 내용도 신선하다 못해 특별하다.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쯤? 아니 더 먼 미래에 등장할 성 체험 머신(?)을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내 부족한 글발로는 설명이 부족하니 작가의 글을 빌린다.

내가 보기에 이응은 도시 곳곳에 있는 공중화장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화장실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쓸모로 만들어졌으며 사용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기에 들어가 이응이 제공하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새 버전의 캡슐이 나올 때마다 이응의 현자들이 언론에 나와 이응은 신의 축복이자 인지과학의 발달이 선사하는 혜택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돈으로 사람의 육체를 사고파는 매춘이나 원치 않는 임신, 온갖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 청결하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건강하게 욕구를 해결하자고 말했다.


비행기 안이라는 특별한 시공간 때문인지 몰라도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난기류를 만난 나의 불안한 감정 상태와 좁은 비행기 좌석이 갖는 공간성, 내 뒤에 바로 시부모님이 계신다는 특이성(왠지 시부모님께 책 내용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우스움)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릴 적 봤던 SF영화에선 음식 대신 캡슐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고 상대방에 타액이 전파될 필요 없는 키스 대신 머리에 전자파 기기를 붙였던 것 같은데... 바로 소설 속에도 이 비슷한 풍경들이 그려진다.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 꼭 안았을 때 전해지는 온기, 심장이 맞닿았을 때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 없이도 이 모든 감정 해소를 캡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이 모든 감정들이 기계로 대체된다고? 소설이지만 정말 인정하기 싫었다.


받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곳.

나는 '하고'와 '받고'를 모두 선택하고, 어깨와 가슴 부의를 색칠했다. 특정 부위를 터치하면 이미지가 확대되어 삼차원 그림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뺨과 목덜미, 유두와 배꼽, 옆구리부터 허벅지, 놀랍도록 세밀하게 그려진 질과 외음부, 엉덩이, 발가락........ 패스, 패스, 패스. 그 뒤로도 선택은 끝나지 않았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 중에서


어릴 적부터 혼자 상상하기와 점수 매기기를 좋아했다. 이를테면 함께 노는 친구 7명이 있다 가정하면 난 그날 하루 친구들과 관계, 친밀도에 따라 친구 7명을 1등부터 7등까지 좋아하는 순서 메기기 놀이를 한다. 그 전날에는 2위였던 친구가 1위로 올라오면 나 홀로 피식피식 웃기도 했고, 가령 내게 서운한 행동을 했던 C에게 대놓고 뭐라고는 못해도 나만의 순위 속 제일 하위권에 처박아 소심한 복수를 했다고 상상하는 일. 그 유쾌한 상상은 나 혼자만의 은밀한 비밀이며, 매일 조금씩 순서가 바뀌기도 했다. 

소설 속 이야기와 비슷한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인간 대신 기계가 대체하는 그 범위에 대해선 분명한 신의 고유 영역이 있다고 믿고, 성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아이들이 자녀를 낳고 사는 동안은 '이응 이응'이 현실화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의 스토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옛날식이 좋아'라고 말할 테다.


여행 셋째 날 새벽 숙소 침대에 누워 커튼을 걷히자 파란 하늘과 바다, 고은 모래가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시부모님과는 첫 해외여행인 데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 가이드를 자처해 살짝 걱정도 했었는데 이틀을 지내는 동안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짜놓은 일정과 숙소에 연신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충만한 이틀을 보내고 여행 3일 차,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7인의 작품들을 다시 음미해 본다. 

하나하나 모두 인상 깊었지만 난 그중 앞에서 언급한 김멜라의 '이응 이응'과 김지연의 '반려빚'이 특히 기억에 남았고, 이 시대의 씁쓸한 교육 현실을 정교하게 표현한 김기태의 '보편 교양'도 좋았다.

전세 사기로 1억 원이 넘는 빚을 전 애인에게서 떠안은 주인공. '반려빚'이란 제목은 분명 처음 접하는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꼭 예전에 알던 단어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반려빚을 생각해 낸 작가의 기발함에 놀래고, 보통의 연인이 아닌 여성 퀴어커플을 주인공으로 써 내려간 것에 대해 이 사회 소수자들이 갖는 고뇌와 쓸쓸함을 엿보기도 했다. 가끔 보통 그 나이 평균대 보다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돈을 어떻게 모았어요? 부러워요. 저도 죽기 전에 그 정도 돈 모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아.. 이게 저희 집인가요? 은행거지. 대출인생이에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잖이 많다. 빚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인가?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출이 해지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빚을 다 갚고 나자 그제야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쑥과 마늘만 먹고 삼칠일을 버텨낸 곰처럼 정현도 욕망을 최소화한 채 수십 개월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으로...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전세 대출금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진짜 반려처럼 잘 데리고 살아야 했다...... 중략......  김지연의 '반려빚' 중에서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속에는 전세사기, 성 소수자, 바쁜 생활 속에 늘 외롭고 허무한 현대인, 위선으로 가득 찬 지식인 등 어디선가 접했거나 내 주변에 실제 있을법한 이야기들, 동시대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7인의 작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이런 젊은 작가들의 주옥같은 글이 있기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이 시대의 암울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있음에 감사한 마음. 다만, 매년 발행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어둡고 우울하고 막막한 얘기들로만 채워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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