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가영 Jun 02. 2024

<언제나 책봄>'가재가 노래하는 곳'

신비로움 그 자체...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

정말 오랜만이다. 그다음 페이지의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소설이지' 라며 연신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다 읽고도 오랫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아 주인공인 카야를 떠올렸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배우가 어울릴까? 퇴근길 주황을 넘어 보랏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책의 배경인 노스캐롤라이나 해안 습지를 상상한다. 극한의 외로움 속에서도 카야를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광활한 숲과 미지의 늪, 모래와 함께 반짝이는 조개들, 카야의 건강한 머리칼, 그리고 그녀를 배신한 몹쓸 체이스 앤두루스의 반반하고 야비한 얼굴 등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이후 단숨에 몰아치듯 읽어 내려간 책이 최근 몇 년간 없었는데 이 책은 꼭 그랬다. 마치 내가 소설 속 그 장소로 타임머신을 타고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 작가 델리아 오언스의 오랜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문장들이 녹아들었기 때문일 게다.

먼저 작가 소개를 하면 미국 조지아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대에서 동물행동학으로 학위를 받은 박사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아프리카에서 7년 동안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한 그 성과를 정리해 엮은 논픽션으로 자연 에세이 분야 존 버로스상을 받았고,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선보였다. 책을 다 읽고 작가가 몹시 궁금해져 자료를 찾아봤다. 인터뷰 기사의 실린 파란 눈동자의 회색의 긴 머리를 한 그녀는 마치 은빛 여우를 닮았다.

평생을 생태학자, 자연 관찰자로서 살아온 그녀가 인생의 황혼기라 할 수 있는 일흔 즈음에 소설로 완전한 존재감을 드러낸 사실! 그 자체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여기서 또다시 용기를 얻는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걸. 하루의 경험들을 켜켜이 쌓아 나를 만들고, 그 여정을 글 속에 녹여보자. 앞으로의 나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지 몹시 궁금해진다. 


1부 습지, 프롤로그의 첫 문장부터 날 사로잡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꿈 꾸며 언젠가는 가보리라는 희망.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 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카야의 애인이던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늪에 누워있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아빠의 잦은 폭력과 폭언으로 습지의 적막한 판잣집에 살던 엄마는 카야를 두고 떠난다. 엄마에 이어 오빠, 처음 사랑을 느낀 남자, 아빠에게까지 수 차례 버림을 받은 어린 카야를 품어준 건 광활한 자연이었다.


작가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제 소설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헤쳐나가도록 기운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카야의 이야기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우리가 꿋꿋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줍니다. (조선일보 발췌 2019. 07. 12)"라고 밝혔다.


작가는 이 소설을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난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카야의 그 외로움이 자연 속에 투영돼 더욱 눈부시고 절박한 슬픈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서도 탄탄하게 전개되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와 복수, 배움, 눈앞을 보듯 매끄러운 묘사, 살인과 미스터리가 풀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 긴장감은 베스트셀러의 요건을 다 갖춘 것 같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절망감에 빠졌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조개껍데기를 보며 탐색하는 카야의 모습을 볼 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조개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가장 귀한 것들만 골라 한 군데 쌓아두었다. 보트를 뒤집어 물을 빼고 바닥 이음새를 따라 꼼꼼하게 조개들을 끼워 넣었다. 카야는 당당하게 서서 물을 탐색하며 돌아갈 길을 연구했다. 바다를 읽고 조개들한테 배운 교훈대로 바람 부는 반대편으로 들어가 곧장 뭍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선 "인생은 어차피 '독고다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카야는 체이스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거절로 점철된 삶이 슬펐다. 머리 위에서 씨름하는 하늘과 구름에 대고 카야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인생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말이야."


어릴 적부터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부모님과 특별히 부족한 것 없는 가정환경,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지만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 살다가도 어느 날 풍선처럼 꺼져버릴 때. 그러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란 생각까지 다 달아 허공을 바라보다 눈물이 나올 때. 깊이와 농도는 다르지만 카야의 외로움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이 문득문득 밀려왔다.  이제는 내 곁에 항상 하나님이 계신다는 종교적 믿음이 생기면서 예전과는 더 단단해진 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외로움을 알기에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아주 짧은 찰나 자연이 모래의 각도를 정확하게 비춰 스치는 미소를 빚어낸다. 다음번 조수가 빠지면, 다음번 급류가 닥치면 또 다른 모래톱을 조각하고 또 다른 모래톱을 빚어내겠지만, 이 모래톱은 또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카야를 받아주고 삶의 교훈을 가르쳐준 이 모래톱과는 작별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카야가 만났던 *이안류를 다시 만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다음번 조수가 빠지면 빛나는 모래톱이 빚어진다.


거꾸로 치는 파도인 이안류가 발생한다 해도 거센 바다의 파도 뒤에는 영락없이 잔잔한 평화가 찾아오고, 광활한 세계는 끊임없이 돌고 돈다는 진리.

작가 델리아 오언스의 속에 축적된 보석 같은 글들이 나에게 별처럼 콕 박혀 빛나는 밤이다.




*이안류: 해안으로 밀려오던 파도가 갑자기 먼바다 쪽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해류를 말하며, 일반 해류처럼 장기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폭이 좁고 유속이 빠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수시로 변화하는 해저지형 조건, 해안선의 형태 등에 따라 국지적으로 발생되기 때문에 과학적 관측이 어렵고, 현대 해양과학 기술로 예측이 어렵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안류 [rip current] (해양학백과)



이전 19화 <언제나 책봄>'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