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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Jun 09. 2024

<언제나 책봄> '아침 그리고 저녁'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무작정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막상 성적을 보니 인 서울은커녕 요켠대 이 사회에서 말하는 명문대에 갈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원래부터 연기가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그런데 마침 내가 사는 청주에 연극영화학과가 있네' 하며 큰 고민 없이 진로를 결정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인 대입 실기를 위해 처음 공부했던 작품이 안톤 체호프에 '갈매기'였다.  연기랍시고 여주인공인 니나의 독백을 끊임없이 외웠었던 기억이 난다. 극에 몰입해 인물 해석에서 나오는 대사를 내뱉는 게 아니라 대본에 있었던 활자 자체를 외우는데 급급했던 때. 내면보다는 어떻게 비추어질까를 더 신경 썼던 애송이 시절.

돌이켜보면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가 연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건 참 잘한 일이라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는 내내 소극장 햇살 사이로 아른거리던 먼지와 공연이 끝난 후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느꼈던 허무함, 대학 시절 밤새 연습하는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밖으로만 맴돌았던 쓸쓸함 같은 게 생각났다.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은 소설이었다. 어쩌면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일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시작과 끝이 있는 무대.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며 연극적 요소가 머릿속에 맴돈 건 욘 포세의 특이한 문체 때문이리라. 마침표 없이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소설이라기보다는 연극 대본을 읽는 느낌과 유사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사슬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문장과 하나가 되어 그것들이 지어내는 피오르의 리듬을 타게 된다.


어부 요한네스가 태어나는 순간과 그의 흘러간 삶, 그리고 이제 막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아침 그리고 저녁>에도 어김없이 피오르의 바람과 파도, 늙은 어부의 기침소리 같은 것들이 있다. 어눌한 구어체와 비문,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사슬, 동일어의 반복, 대화와 대화 사이의 침묵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문장과 하나가 되어 그것들이 지어내는 피오르의 리듬을 타게 된다.  

-박경희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요한네스가 태어나는 날 아버지인 올라이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도입부를 처음 읽었을 땐 사실 동일어의 반복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들로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내가 잘 이해를 못 하는 건가?' 하며 인내심을 갖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책을 몇 번 덮었다 열었다를 반복하면서도 금세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져 손에 쥐게 하는 마성의 매력.


조금만 더 참아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사내아이라면, 요한네스라고 부를 겁니다, 올라이가 말한다
어디 보자고요, 산파 안나가 말한다
네 요한네스요, 올라이가 말한다
제 아버지처럼요, 그가 말한다
그래요 좋은 이름이네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그리고 다시 비명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더 크게


참아요 올라이, 늙은 안나가 말한다
조금만 더요, 그녀가 말한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녀가 말한다



소설 속에는 특별한 사건이 펼쳐지는 것도, 대단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촌 마을의 평범한 노르웨이의 어부 요한네스가 태어나서 죽고 난 이후 유령이 되어 평소 만났던 친구와 이야기하고 죽은 아내와 만나고, 그의 일상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 속에는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아침 그리고 저녁>으로 중의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의도처럼 인생의 덧없음,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한 것과의 이별, 그리움, 일상의 소중함이 깃들어 있다.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길이면 독일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 막연한 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 하면서 경험한 신비한 경험들, 성경에 관해 대화를 했다. 주로 내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이모는 그에 대한 반응이나 의견 정도였다. 우회전이나 좌회전 없이 지하차도를 지나 쭈욱 직진으로만 가는 코스였기 때문에 하루 중 가장 부담 없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이었다. 양 길가 펼쳐진 메타세쿼이아의 풍경까지 더해져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시간들.

이제는 이모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이모와의 전화 대신 아침 기도나 유튜브 강연, 기분에 따라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출퇴근을 하는데 아주 가끔 지하차도를 지날 때면 묵직한 슬픔과 그리움이 턱밑까지 차올라 눈물이 막 쏟아진다. 그날 우리 집 현관에서 나눈 이모와의 인사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더욱 꼭 껴안아줄걸. 이런 생각부터 임종 직전 하얗게 질린 퉁퉁 부은 이모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모가 많이 생각났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죽음을 더 겪게 될 텐데 이 소설을 게 된 걸 참 다행이라 여겼다.  요한네스처럼 덤덤하게 자신이 살다 간 장소와 시간에 조금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난 어떤 모습일까?

가끔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선하게 웃는듯한 이모의 희미한 잔상이 보인다. 다행이다. 좋은 곳에 가신 것 같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아요? 그곳은? 내가 묻는다

우린 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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