냐짱 해변의 해피 비치에서 추억을 끝으로 7박 8일간의 베트남 여정을 마무리한다. 극성수기의 부산 해운대의 그 느낌처럼 해변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는 높은 호텔 빌딩은 도시의 찬란한 빛을 뿜는다. 냐짱 시내는 숙소가 있었던 조용한 깜란 지역과 다른 도시적인 북적임, 활력이 넘쳐서 좋다.
고운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딸에게 둘만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b의 어깨에 살짝 기댄다. 여행 중반 시뻘겋게 달아오른 b의 어깨가 까만색으로 변해갈 즈음 우리 여행은 끝나지만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열일곱에 첫사랑으로 만나 15년의 연애기간을 보내고 12년을 살았으니 30년 가까이 봐온 사이여서 사실 요즘에는 사랑이란 감정보다는 오래된 친구, 삶의 동반자, 든든한 내편 정도란 느낌이 더 많았다.
기자와 미용사로 각자 일터에서 쉼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난 나대로 아이들과 집안일 챙기느라 바빴고, b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하며 지친 몸을 소파에 구겨놓고 조금이라도 쉴 틈을 찾기 바빴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기자를 그만두니 둘 중 하나는 좀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노는 부인은 어째 예전보다 더 바빠진 것만 같다. 요리가 손에 익지 않아 밥 한 끼를 차려도 설거지거리는 늘어만 갔고 빨래를 갤 때 소매와 소매 사이 각 잡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늘 이른 아침에 나가 취재 스케줄 따라 비교적 루틴대로 움직이던 내가 시간을 자유 의지대로 쪼개쓸 수 있게 되자 욕심이 생겨 버렸다. 그간 여유가 없어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보고 싶었던 전시와 공연도 보러 다녀야 했다. 한 동안 화장대 옆 한편에 세워놨던 첼로 레슨도 다시 시작했고, 골프에 맛 들려 호시탐탐 라운딩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기에 이런 변화된 일상을 글로 옮기고, 원 없이 책도 읽어야 하니 백수가 된 난 24시간이 턱없이 모자라 매일 피곤한 일상을 보냈다.
그야말로 빡빡한 일상 속에 보낸 석 달, 남은 가족은 가족 나름대로 놀고 있는 나의 백수 포지션에 대한 각자의 바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은 집에 있는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짜잔 하고 팔 벌려 자신들을 맞이해 주길 바랐고, b 역시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11살, 13살 사춘기에 길목에 선 아이들을 케어하는 일에 더 집중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더욱이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지라 갑자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난 사실 부모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골프 연습장으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한 사람의 변화가 집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서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내 인생 최대 결정이었던 퇴사 이후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생각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일렁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내던져져 그 흐름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을 구르고 또 구르면 보냈던 지난 석 달.
석 달 만에 가졌던 8일간의 긴 휴가는 그간 잊고 있었던 첫사랑에 설렜던 그 기분과 꽁냥꽁냥한 연인 간의 달달한 그 느낌을 찾아주었다. 다시 사랑! 이거 하나만으로도 여행의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찬란한 여름의 햇살 아래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는 그 시간이 소중했다. 한 없이 펼쳐진 파란 바다를,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며 반짝이는 물 위에 떠 있는 그 시간은 날 새롭게 했다.
사실 일을 그만둔 후 바쁘게 보낸 시간들 속에는 내 안의 두려움이 꼭꼭 숨어있었다. 기자란 딱지를 떼고 세상에서 영영 잊히면 어쩌지, 아이들은 자라는데 통장 잔고는 계속 줄어갈 텐데 어쩌지,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잣대에서 점점 멀어져 버리면 어쩌지... 하는 내 안의 두려움이 늘 나를 바쁘게 움직이게 했다.
뭐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아서, 귀하게 얻은 시간인만큼 1초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백수인데도 진정한 백수처럼 쉼을 누리지 못했다.
그런데 난 여행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먹고 자고 수영하고 놀고먹고를 반복했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할 만큼 부족함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었던 시간들 같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다시 인생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