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난 아빠에게 오늘도 전화를 했다.
다른 날 보다 유난히 더 힘들어하던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어제 난 응급실 다녀왔어."
"무슨 일로요?"
아빠는 줄줄이 어제의 사연을 늘어놓았다.
"응~ 변비가 너무 심해서 이제야 좀 살 것도 같다. 그런 것 보면 병원도 분명 있어야 할듯 싶지."
안쓰러운 그런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고깃국에 이것저것 준비해 온 모양이다.
근데 그 다음 날이 문제였다.
다음날 다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죽겠어!"
"아빠 무슨 일 있나요?"
"죽을 것만 같아, 자꾸만 설사를 해. 너무 어지럽고."
"그럼 병원에 다녀오셔야지."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아빠의 힘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자식은 다 짝과 사니까 괜찮아.
너랑, 그리고 혼자 남을 엄마만 너무 불쌍하지."
하루가 불안만 되었고 무거운 마음에 그냥 눈물만 그렁그렁 해진다.
빚만 잔뜩 끌어안은 채 염치없이 혼자 아이 데리고 친정에 들어가 살 때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그 당시에는 애 아빠가 생활비를 줬었다.
달달이 빚을 갚으며 보내던 어느 날
엄마는 딸을 앉혀 놓고 얘기하셨다.
"주은 엄마, 아이도 이젠 커가는데 임대 아파트 라도 얻어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틀린 이야긴 아니다.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근데 어느 세월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아이는 어린이집 다녀와 왠지 풀이 잔뜩 죽은 느낌.
나중에 알은 거지만 아마 선생님이 차별을 하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집을 찾아가 간식도 건네줘 보고 해보지만 그다지 소용없었다.
더 날카로워지는 느낌뿐.
결국 어린이집을 바꾸니 아이는 다시 밝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는 결심했다.
한 달에 100만 원을 적금을 모으기로.
그러자 정말 돈이 쌓이는 게 확확 보였다.
문제는 빚을 갚고 적금 모으니 생활비는 없었다.
언젠가는 오죽해 어린이집 비용이 없어 밀린 적도 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해결해 주셨다.
결국 2년이 조금 넘자 지금까지 살고 있는 아파트, 보증금 1800 정도 내고도 금액이 남아 너무도 행복했다.
결국 우리 모녀는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며칠동안 흥분된 채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이 역시 자기방이 있다며 너무도 좋아했다.
아파트 계약하기 앞서 여러 서류 중 애 아빠 직장 다닌다는 증명서가 필요했다.
너무 늦게 도착해 안 되는 줄 알고 포기하고 있을 때, LH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계약해도 된다고 말이지.
그 후 5년 이 되어 빚도 끝나게 될 때쯤 그만 주은 아빠는 회사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결국 그 꾸준히 받던 생활비를 혼자 해결 하려니 모아둔 돈은 쉽게 바닥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위기는 더욱 두터워지고 말았다.
이혼이라는 상처가 깊어지던 우울증.
그런 내게 친오빠들은 생활비를 보태어 주었고, 그뿐 아니라 수급자 신청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느꼈다, 세상에 혼자 놓인 기분.
아이가 힘이고 용기였기만, 알 수 없는 속상함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러려고 그 많은 빚을 갚으며 살았나 싶어 나 자신마저 원망스러웠다.
아니 앞으로의 삶이 그냥 두려웠다.
그런 찰나에 장애인 이동차 기사분은 내게 학교 입학을 권하셨다.
바로 특수학교인 강원명진학교.
이럴까? 저럴까? 고민 끝에 난 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중년의 학교생활.
적어도 학교에 있는 그 시간 동안은 어떤 고민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반 어린 친구들은 전맹이다 보니 마음마저 숙연해지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니 더 그랬고 무엇보다 주은이를 조금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커지던 그때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나는 시간이 같고, 무엇보다 아이와 시험 기간도 방학 기간도 같이 느끼는 모녀의 공감대.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같이 수업받고, 시험 보고.
그런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고 아이들을 더 도와주려는 나의 마음.
그덕일까, 아이들 세계에서 나는 인기가
짱이었다.
그냥 난 감사했다.
이 정도라도 세상이 보인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오히려 대견하고 너무 멋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