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여름, 엄마와 단둘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를 떠올려 보자면, 회사에서는 밀려드는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30대 중후반에 남자친구도 없으니 금방 결혼할 것 같지도 않고, 모아 놓은 돈을 물처럼 쓰고 싶은 기분이 호랑이 기운처럼 솟아나던 때였다.
해외고 국내고 가릴 것 없이 기회가 될 때마다가산탕진여행을 떠났다.이번 휴가땐 어딜 가지? 여행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 여름에 에어컨도 안 틀고 우두커니 앉아 부채질만 하고 있을독거노인 두 명.
"이번 여름휴가 때 제주도 가자. 내가 쏠게!"
"제주도?"
"그래,가서바다 구경도 하고. 아빠 회 좋아하잖아. 회도 실컷 먹고."
"에이, 아빤 안가. 차 타고 속초 가면 되지. 비행기 타고 뭔 제주도까지 가냐."
맞다. 아빠는 목적 없이 구경하는 걸 싫어한다. 무릎이 안 좋아 걷는 것도 쥐약이다. 셋이 홍콩에 갔을 때도 아빠는 더 이상 못 걷겠다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더랬지. 그 이후먼 여행은 안 간다고 선언했던걸 깜박했다
반면 엄마는 반 산악인이다. 매일 같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등산을 한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엄마에게 산 하나 사주고 입구에 엄마 이름을 크게 써놓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다. 소식에 채식에 운동까지. 나쁜 생활습관이라곤 1도 없는 엄마는 아마도 신체나이가 나보다 적을 것이다(아니 이는 확실하다).
암튼 아빠의 거부권 행사로 나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아빠 없이 엄마와 둘이서 그렇게 긴 여행을 간 건 처음이었다. 우리는 둘 다 장롱면허 소유자이기에 항상 아빠라는 '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밖에 나가 해변을 걷기만 해도 좋은 곳이 아니던가. 이미 몇 차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라, 딱히 어딜 막 돌아다닐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기꺼이 뚜벅이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엄마는 제주도에서 거의 나의 단독 사진사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리조트 수영장에서도 우도 해변에서도 당신은 발에 물 한번 묻히는 게 다였다. 나머지 시간은 뙤약볕 아래에서 딸내미의 인생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동분서주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조식을 먹고 근처 교회로 향하는 길에도 엄마는 사진사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여기 서봐. 여기 뒤로 바닷가가 정말 멋있다."
우리는 일부러 제주 해변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 엄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성격 급한 내가 앞장서서 걸으며 엄마한테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 마련인데, 뭐 때문인지 잠깐 내가 엄마보다 뒤에 서게 된 것이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키 진짜 작네.'
'더운데 목에 저 수건은 빼지 뭐 하려고 했대.'
'모자는 새로 하나 사야겠다.'
그때 나는 회사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런 딸을 만나기 위해 버스타고지하철 타고왕복 3시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갔다. 바리바리 짐보따리를 싸들고 말이다. 어쩌다 야근이 당첨된 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딸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 엄마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 아니, 괜찮아. 엄만 시간 많은데 뭐."
돌아보면 난 항상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엄마는 항상 시간이 많다고 했다. 당신은 시간이 많으니까 언제든지 괜찮다며 무조건 나의 시간에 당신의 시간을 맞췄다. 내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아까워하면서 당신이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다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에게 남은 시간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은데.
그 순간 갑자기 철이 들었는지 엄마의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은마음이 들었다. 웃는 시간이 더 많게 해드리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