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긴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을 몇 주 앞둔 10월의 어느 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내년 5월 안에 내가 결혼을 한단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나도 모르는 내 결혼 소식이라니(아니 아버지, 당장 남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결혼입니까). 문득 유럽 여행을 떠날 때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말이 떠올랐다. 파란 눈의 노란 머리 사위도 좋으니 제발 누구라도 데려오라던(엄마 미안... 미션 실패야...).
"똘, 언제 들어오지?"
"나, 10월 중순에 갈 거 같아. 왜?"
"알았다. 들어오면 바로 누굴 좀 만나보면 어떨까?"
"뭐? 누군데?"
"고모가 그러는데 어쩌고 저쩌고...... 아무튼 5월 안에 무조건 결혼한다니까."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무슨 헛소리냐고 했지만 아빠는 거의 장담하듯 내게 말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선을 봐야 한다면서.
유럽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 5년 넘게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던 전 남자 친구와 완전히 끝났다. 20대 후반 결혼 적령기에 만나 결혼하자는 말만 하면서 좋은 시간을 다 날려먹은 놈.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전 남자 친구가 좋아서라기보다 그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만났던 것 같다. 전 남자 친구는 내가 평소 배우자로 생각하던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였다. 딱 하나 성격만 빼면.
전 남자 친구는 정서가 불안했다. 오죽하면 그의 아버지가 애 성격 이런데 뭐가 좋아서 만나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그는 무엇보다 부모님과의 관계를 어려워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다며 황당해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울기라도 하면 시끄럽다며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하는 게 소름 끼친다며. 그 말을 듣는 나 역시 소름이 돋았다. 그의 어머니는 최소 의사, 변호사 며느리를 원한다고 했다. 그걸 나한테 미안한 감정 1도 없이 말했던 인간.
전 남자 친구를 우리 부모님께 소개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린 점심을 먹고 함께 산책을 나섰는데 전 남자 친구가 아빠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지적질을 했다. 순간 깊은 빡침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결혼이 엎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을중의 을'이었으므로. 그때 '이 미친 X이 돌았나' 하며 당장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지금도 후회된다. 한동안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려 아빠가 걷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아렸다.
한 번도 내 결정에 뭐라 한 적 없던 아빠가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냈던 것도 전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난다고 했을 때였다. 너무 별로지만 네가 좋다 하니 허락한다고. 그리고 내가 그와 완전히 헤어졌다는 소식에 잘했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다.
입국하고 몇 주 안된 그해 빼빼로 데이에 남편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아빠의 예언(?)대로 우리는 다음 해 4월(5월도 아니고)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초스피드 결혼 소식에 몇몇 친구들은 결혼 상대가 제대로 된 놈이 맞는지 의구심을 드러냈다. 실제로 뒷조사를 해야겠다고 나선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나름 검증된(?) 인물. 사촌동생이 수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대학원 사수였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은 남편이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말로 엄마 아빠의 호감도를 한껏 상승시켰다.
사촌동생의 눈은 정확했고(이과생인 남편은 한때 사회복지를 전공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마음이 좋다. 그래서 나를 만났구나 생각한다면... 합리적 의심임을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남편을 만나면서 전 남자 친구가 얼마나 쓰레기였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울면서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친구들은 때려치우라며 나보다 더 열받아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라고 눈물콧물 짰었는데,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나보니 '나쁜 놈'이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겠더라.
좋은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사소한 일로 서로 투닥거리고 나면, 항상 서로에게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우리.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 지금이라고 느끼는 요즘. 그때 만약 전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나는 매일 눈물 바람에 울면서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마음고생하면서 사는 딸내미를 보는 엄마 아빠의 속은 문들어졌겠지. 십중팔구 이혼을 했을 테다. <나는 솔로 돌싱 편>에 나갈 숫기도 없기에 혼자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고독사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끝엔 최악이 있다.
아빠는 요즘에도 종종 5월 안에 너네 결혼시킨다고 했던 일화를 상기하며 셀프 칭찬을 일삼는다. 그때마다 아빠 대단하다며 엄지 척을 하는 우리. 남편을 '우리 집 막내아들'이라고 부르는 엄마와 자식보다 더 자신을 닮은 사위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아빠 곁에서 작은 일상을 사는 오늘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