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로 산을 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잊고 살았다.
서울에서 살던 시절, 바다가 보고 싶으면 서쪽이나 동쪽으로 가곤 했다. 서쪽으로 가면 인천이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속초나 강릉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동해가 서해보다 서너 시간 훨씬 더 멀었지만 대부분 젊은이들은 동해로 길을 나섰다. 이유는 서해엔 없는 낭만이 동해엔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시엔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동대문구에 위치한 청량리 역에서 완행 비둘기호를 타야 했다. 주말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입석이 아니라 짐짝 올려놓는 짐칸 선반에도 사람이 올라타 가기도 했다. 마치 한국전쟁 때 피난열차를 연상시키는 이 고생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나지막하게 송창식의 <고래사냥>를 떼창 하곤 했다. 참 눈물겹도록 그리운 시절이다.
경주로 이사와 맨 처음 간 바닷가가 감포 앞바다였다. 지금은 구(舊) 길이 되어 버린 추령터널을 통해 바다를 만났을 때, 서울 촌놈은 참 신기했다. 30~40분 만에 바다를 볼 수 있다니... 그 이후로 감포에서 장기·모포, 구룡포를 걸쳐 포항까지, 혹은 그 역순 드라이브 겸 출사는, 내 오랜 된 습관이 되었다.
바다를 끼고 달리다 길이 끊기면 국도로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바닷길을 찾아내려 가고 올라가기를, 한 열 번가량해야 하는 이 길은 아슬아슬(?)하지만 묘한 재미와 눈요깃감을 준다. 그동안 내가 이 길을 돌아다닌 게 한 백번은 되었을 거라. 물론 백번은 뻥이다.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면 대 여섯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다 낯선 길이나 궁금한 길을 만나면 일단 들어가 본다. 실망할 때도 있지만 멋진 새 길을 만나면 콜럼버스라도 된 듯 환호를 지르고 한 참 머물러 있다가 가던 길을 마저 가곤 한다. 그러다 호미곶면 ‘한 달 비문재’라는 곳에서 만난 2미터 정도의 크기의 표지석에 새겨진 ‘虎尾사랑 숲’이 눈길을 끌었다. 이 ‘호랑이 꼬리 사랑 숲’이 궁금했다. (얼마나 멋진가? 언제 기회가 되면 꼭 가봐야지)
그 후 얼마 전, 또 그 앞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으나 이번에는 평소 작정하고 있던 것을 실행해 보기로 하고 그 산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길이 괜찮았는데, 올라 갈수록 오르는 길에 바퀴 자국만 있었고 길 양편에서 잡목들이 제멋대로 팔을 뻗어 차체를 긁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올라 가면 아름다운 숲길, 산마루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거친 산길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길이 계속 앞으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차를 되돌리고 싶었지만 길이 외길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되돌아가려면 온 만큼 후진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가면 괜찮아질 거야, 기운을 내자고 스스로 위로하며 차를 몰았다. 그러자 일부 구간에서는 차 바닥이 산길과 긁혀 금방이라도 옴짝달싹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길 30 여분, 이번에 내리막길이었다. 좀 다행스럽긴 했지만 주위에 인기척이라고 찾아볼 수 없어, 만약 펑크라도 나면?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예측할 수 없는 전진만 하면서, 나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 돌아가야 하는 데, 돌이켜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데, 딱 거기 까지만 해야 되는 데, 미적미적거리다, 결국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일이 나에게 종종 있었다. 이런 걸 미련(未練)이라고 한다.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어 징징거리는 스탠스.
언젠 진 몰라도 가야 할 때보다, 그동안 살아온 날이 훨씬 긴 세월을 살아온 나다. 그 산길에서 <Think deeply, Do less, More effective>를 내 <표지석>으로 삼았다. 무사히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ㅠㅠㅠ. ‘虎尾사랑 숲’ 일은 내게 타산지석이 된 것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저 멀리 자동차 도로가 보이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려와 보니 호미곶 인근이었다. ‘虎尾사랑 숲’ 돌 표지석을 들머리 해 SUV나 RV 차량이 아닌 승용차로 한 시간 넘게, 거친 산을 넘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참 정신 나간 어설프고 위험한 짓을 한 것이었다. 호기심도 좋지만...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오만방자의 극치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 산길에서 작심한 <표지석>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새벽 잠결에 뒤척이다가 불현듯 그 <표지석>이 떠올랐다. 맞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시작된 현실에 살아내기 위해서 지지고 볶는 일상생활에서 <깊게 생각하고...>라는 <표지석>은 마치 화장실 가기 전 마음과 같은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어둠 속에서 부끄러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 많은 것을 잊고 사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