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절망 그리고 슬프도록 시린 사랑
차다.
새벽 수영장 물에 입수하는 순간,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하다. 서둘러 몇 바퀴를 돌아야 몸에 낀 이 찬 꺼풀을 벗길 수 있다.
자유형으로 맞은편 레인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물 밖으로 숨 쉴 때마다 대형 유리창 밖 새벽빛이, 오늘은 묘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오늘 첨 보는 것도 아닌데. 다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천히 팔 돌리기를 하면서 유심히 본다. 오늘 무엇이 이렇게 기분을 이상야릇하게 만드는 걸까.
아... 저 색 <blue>때문이다. 유리와 아침 햇살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feel blue>... 푸른빛을 느끼다. 어떤 이들은 푸른빛의 의미가 우울과 절망, 슬프도록 시린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몇 바퀴를 돌고 바로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색을 직시(直視)한다.
평소 남다를 것 없던 푸른색이 오늘 아침 유독 색다르게 인지(認知)된다. 그것이 혹,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스스로 더 피폐하고 있기 때문인가? 자문해보곤, 강하게 도리질한다. 그리고서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라고 혼잣말로 읊조려 본다.
도가(道家)에선 문명과 욕망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 자유라 하고, 불가(佛家)에선 죽음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난, 진정한 자유란 행위의 목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바라는 것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사전적이고, 지엽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래서 그 위태로울 수 있는, 잘못된 선택일 수 있는 자유에 대해 사르트르는 <자유란 형벌에 가깝다>라고 외친 걸까. 설득력 있는 말이긴 하지만 본질은 모를 일이다.
수영장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깊이 자맥질을 한다. 문득 기억에도 없는 자궁의 양수 속에서처럼 편안한 맘을 얻는다.
푸른색이 무엇을 상징하든, 오늘 이 새벽에 만난 <Blue>가 내 마음을 안정되고 평안하게 해 주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자유를 꿈꿔본다.
<블루>... 푸른색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산재해 있었다.
천장도 바닥도 심지어 벽 일부 타일도, 다 푸른색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오랫동안 새벽마다 이 수영장을 들락거렸건만.
마치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밤에는 들리고,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밤에는 보이듯이, 지금 내 심신은 밤인 듯하다. 평소 들리지, 보지 못한 것들을 듣고 보고 있으니.
게다가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에서 줄리(줄리엣 비노쉬 扮)가 밤마다 수영장에서 거친 호흡을 내쉬며 죽을 듯(?)이 수영을 하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을 때, 실소(失笑)하고 말았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난, 이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웬 청승?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