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잊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동네 사진관 스튜디오에서 아들 백일 기념으로 찍은 A4 크기의 사진이었다. 당시 이 땅에는 월드컵 광풍이 불던 2002년, 아들은 그 해에 태어났다. 사진 속 우리 가족들은 다들 붉은 악마 응원복을 입고 있었다.
추억이 듬뿍 담긴 사진을 가지고 내려와 주방 냉장고 문에 붙여놨다. 식구들이 사진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내 무릎에 앉아 있던 아주 조그만 1/3 살도 안 된 꼬마는 이젠 내 키를 넘긴 지 오래다. 가끔 아들은 일부러 내 옆에 와서 나를 내려다보며 놀린다. “아빠, 아래 지역 공기는 괜찮나?” -아들은 자기 키가 커서 내 머리 위 공기로 숨을 쉰단다-
그 주말에 딸이 집에 와서 그 사진을 보고 깔깔 거리며 웃었다. “이 젊은 사람이 아빠야?” 딸도 이십 년 가까운 세월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놀린다. 아내가 거들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다른 사람은 못 알아볼지도 몰라.” 아내도 나를 놀린다. 그렇게 내가 물들어 가고 (늙어 가고), 남들이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내 정체성(正體性=동일성)은 어떻게 된 걸까?
정체성은 신체(외모)만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는 쉽게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정신(습관, 기억, 성격, 가치관 등)도 정체성에 포함된다. 즉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동일한 본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설사 ‘얼굴’이 바뀌었더라도 ‘기억의 동일성’이 유지된다면 그 정체성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페이스 오프>다. (얼굴을 벗다?/ 오우삼 감독. 존 트라볼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1997년 작)
FBI 수사반장과 악당(테러리스트)이 이런저런 이유로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얼굴이 바뀐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주변인 (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심지어 배우자도)은 단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신체로, 상대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설마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신체의 정체성에만 관심을 갖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능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 영화에서는 두 사람만이 그것으로부터(신체의 정체성)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워진다. 첫 번째는 악당의 사이코패스 동생이다. 그는 형의 얼굴을 한 사람(사실은 FBI 반장)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외모는 형이지만 ‘습관과 성격’은 평소 자기가 <기억>하는 형이 아니었기에 의심을 품었고 그것은 확신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악당의 얼굴로 바뀐 FBI 반장의 아내다.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증오하는 악당의 얼굴을 한 남자가 나타나, 자기가 당신의 남편이라고 우기는 장면은 그녀를 절망케 한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반전이 되는 모티브는 그 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기억>과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다섯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남편의 ‘버릇’에서 일어난다. 물론 얼굴은 바꿀 수 있어도 혈액형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베이스에 깔긴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얼굴은 가면에 불과하다. 얼굴은 표면(표피)적이고 언제든지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습관, 기억, 성격’으로 대표되는 ‘정신’은, 그와는 상이하게 그려지고 있다. 즉 정신의 정체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런 비슷한 종류의 성격을 보여주는 영화로는 <다크 시티>(알렉스 프로야스, 1998) <토탈 리콜>(폴 버호벤 1990), <존 말코비치 되기> (스파이크 존즈, 2000) <무간도 1>(유위강, 맥조휘, 2002) 등이 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도 “인간의 정체성은 신체가 아니라 정신의 동일성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 맺음으로써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가족사진 속 이십 년 전에 내 정신과 지금의 내 의식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이가 들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가진 것과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 젊을 때 ‘진보’적이었던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의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변한 게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보수나 진보나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게 내 평소 지론이다. 이념 같은 건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만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렇게 ‘정신’이 정체성을 인식하고 유지하는데 ‘신체’보다 우위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런데 꼭 그런 거 같지도 않다. 신체의 지속성은 유지되지만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경우 -예를 들어 기억상실증-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기억마저도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퍼펙트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존 로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의식의 동일성으로 본다면 의식이 연속적이지 못하고 동일하지 않을 때 인간의 정체성은 성립하지 못한다.”라고.
그렇다면 과연 정체성의 본질은 뭘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사고나 감정, 가치관 등의 정서적인 요소와, 시간(세월)에 따른 신체적인 변화는 한 인간을 동일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가?
어제가 소서(小暑)였다. 작은 더위? 일 년 중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습도가 높고 날은 덥고해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잠들었는 데... 에어컨을 켜면 추워 깨고, 끄고 자면 더워서 깨고... 열대야에 잠 못 이루고 이리저리 뒹굴다가 오서지기(鼯鼠之技)라는 말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런저런 생각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을 만났다. 지금 나의 정체성?이 뭐가 되었든 간에 우선 쪽잠이라도 좀 자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 날이 참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