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돈이 막 벌리는데 남편이 정신을 못차리네?
장사해서 번 돈은 모두 내 용돈으로 쓰라고 했던 남편의 말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어느새 돈 관리와 생활비 부담은 전적으로 내가 맡게 되었다. 용돈만 벌어 쓸 때와는 무게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미 시작한 일이니 열심히 해나가야 했다. 감사하게도 쇼핑센터 장사를 해보니 이건 되는 장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남편의 예쁜 사촌 누나가 시드니에 살았는데, 그 언니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가 서툴러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언니에게 내 물건을 맡겨보라고 보내주었지만,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던 언니는 결국 물건을 다시 골드코스트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골드코스트에서 장사가 너무 잘되어, 주말 동안 번 돈을 세느라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사람이 더 많은 시드니에서도 잘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언니를 볼 겸 골드코스트로 초대했다. 며칠간 함께 장사를 경험하며 장사하는 방식과 잘되는 이유를 보여주었다. 얼굴이 예쁘고 미적 감각도 뛰어난 언니는 곧바로 감을 잡았다. 시드니로 돌아가자마자 시드니 중심에 있는 큰 마켓에 자리를 잡고, 예쁘게 스툴을 디자인해서 적절한 세일즈 포인트를 잡아 매출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언니는 대단했다.
나는 관광객이 많은 쇼핑센터와 마켓들에 만족했지만, 언니는 쇼핑센터에 제대로 투자하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제 언니가 사업적으로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남편도 주마다 세일즈 대표를 두고 사업을 확장하자고 성화였다. 마켓에서 알게 된 외국인에게는 WA주를, 남편의 지인에게는 빅토리아주를, 남편의 사촌누나에게는 NSW주를 맡겼다. 이렇게 호주 거의 전 지역에 물건을 납품하게 되었다. 각 주의 세일즈 대표들은 마켓이나 쇼핑센터를 직접 운영하거나 물건을 납품하며 수십 개의 스툴을 운영할 정도로 사업이 커졌다. 나는 그 수십 개 스툴에 물건을 조달하느라 매주 항공으로, 그리고 연 2회 큰 컨테이너로 물건을 들여와야 했다.
매일 일에 몰두했다.
주중에는 디자인을 뽑고,
한국에 물건을 오더 하고,
선적하고, 배송 스케줄을 맞추며
각 주의 거래처에서 주문한 물건을 챙겨 보냈다.
쇼핑센터 직원 스케줄을 관리하고,
주말에는 아침 일찍 새벽에 나가서 일을 하고
일요일이나 월요일에는 장사한 돈을 계산했고
인보이스 관리며 회계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몇 달 동안 마켓 외에는 외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남편이 친구인 와니를 초대해 주었다. 와니와 함께하는 날들은 너무 행복했다. 와니는 정말 일도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내가 큰 마켓에 묶여 있는 동안 남편이 구해온 정보를 통해서 와니는 퀸즐랜드의 쇼나 행사에 직원들을 고용해서 남편과 함께 출장을 갔다. 와니와 내가 항상 아이디어를 짜내서 기획했던 쇼백을 팔면서 큰돈을 벌어왔다. 와니는 사업에 고마운 도움이 되었고, 와니와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정말 즐겁고 소중했다.
남편도 주말에만 마켓에 나가고 주중에는 운동하며 노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남편과 다 함께 놀기도 했지만, 남편이 주중에 멜버른이나 시드니의 친구들에게 놀러 가는 일이 많아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와니와 놀면 되니까.
그러다 보니 남편은 점점 마지노선을 넘나드는 듯했다. 내가 전적으로 돈을 관리하다 보니 남편은 내 명의의 가족 카드를 사용했는데, 돈을 진짜 많이 쓰기 시작했다. 술값으로 큰돈을 쓰고 현금 서비스까지 받아 카지노에서 돈을 날렸다. “제발 돈 좀 함부로 쓰지 말라”라고 해도 그는 실실 웃으며 장난으로 넘겼다. 그러던 중 남편이 다시 사륜구동 자동차와 배를 사겠다고 난리를 쳤다. 배도 한번 사봤으면서 그리고 홀랑 말아먹었으면서 제대로 관리를 잘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나는 은행에 빚진 홈론을 다 갚고 돈을 쓰자고 항상 만류했다. 배를 사지 않아도 남편의 씀씀이가 너무 커져갔다. 그래서 여행 간다고 목돈을 가져가면 나도 그 돈을 쓰라고 했다. 그럼 나는 그 정확한 금액을 홈론을 갚았다.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당시 나는 돈을 벌면 손에 틀어쥐고 집값을 갚는데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나는 돈을 세는 게 좋았다. 4불짜리 스티커가 메인 상품이라 장사가 끝나면 동전이 항상 많이 있었다. 그 당시 호주 은행 시스템은 동전을 세는 기계가 없어서 단위별로 동전을 묶어서 입금을 해야 했다. 10센트는 100개를 한 봉지에 20센트는 50개, 50센트는 20개, 1불은 20개, 2불은 25개씩 봉투마다 담아갔어야 했다. 동전을 산처럼 쌓아서 열심히 세었다. 여러 개 스툴에서 들고 온 목돈을 정산해서 은행에 입금할 수 있는 단위로 분류하는 일이 진짜 오래 걸렸는데 재밌었다. 엄지와 검지는 새까맣게 변하고 나중에는 손에서 특유의 쿰쿰한 냄새도 났다. 그래도 즐겁고, 정말 희열이 있었다. 어리석은 스쿠르지 영감이 따로 없었다. 만불씩을 뭉쳐놓은 돈뭉치를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거의 매주 천만 원씩은 입금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 물건값을 지불하느라 송금을 많이 했지만 양손에 무거운 돈뭉치를 들고 월요일에 입금하러 은행에 가는 발걸음이 정말 행복했다. 입금을 마치고 와니와 맛있는 걸 먹는 것도 행복했다. 와니와 함께 하니 주중 업무도 빨리 끝났고, 아이디어도 넘쳐나서 업무 효율이 훨씬 좋았다. 모서리가 닳아 없어져 지우개라고 놀렸던 하얀 차를 타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 돌아보아도 그때만큼 걱정 없이 세상 행복하게 지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세상 걱정 없이 룰루랄라 지내다 보니 남편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