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돈이라도 벌어서 버텼는데 부도가 나버렸네?
임신을 하는 일이 우리 가족 모두의 일이 아니라, 오직 나 혼자만의 일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아이가 생기기 전에 끝내야 한다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뻑뻑해서 무언가를 보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좋아했던 한국 예능 티비도 드라마도 볼수가 없다.
입덧은 너무 심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졸려서 자는 건지 기운이 없어서 기절한 건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을 뜨면 창밖은 까맣고, 또 어느 순간 눈을 뜨면 창밖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가끔 남편이 와서 말을 걸었다. 몸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식단을 관리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정작 그는 술을 매일 마셨다. 몸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가장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술이 아닌가? 나는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정말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한 채로 태교라며 나를 눕히고 배에 손을 대고 이야기인지 술주정인지를 시작했다. 방 안 가득 퍼진 술 냄새에 나는 겨우 한 모금 마셨던 물까지 모두 게워냈다.
어느 날, 너무 기운이 없어서 겨우 눈을 떴는데 남편이 바삭하게 구운 바게트 빵에 아보카도와 구운 치킨을 얹은 음식을 두고 급하게 운동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가져온 성의를 생각해 마른 목구멍에 조금씩 삼켰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잘 씹어서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내 식도는 이미 음식을 통과시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몇번 삼키지도 않았는데 너무 토를 많이해서 식도가 이미 상해 있었던 상태였는지 이제는 물 한 모금조차도 삼킬 수 없었다. 겨우 삼킨 투명한 물조차도 조금있다가 다시 암갈색 액체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뭘까 궁금했지만, 토를 하러 화장실에 갈 힘조차 없었다. 침대 옆에 고개만 겨우 빼고 토하면서 생각했다. 바닥이 카페트가 아니라 타일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날, 브리즈번의 거래처에서 물건을 픽업하러 온다고 했는데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몸이 너무 어지러워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미 거래처 사람이 도착했다. 네일 스티커, 네일 폴리쉬, 각종 네일 관련 제품들을 포장해야 했다. 거래처에서 온 여자아이는 나만큼이나 작고 가녀린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낑낑대며 물건을 담았다. 네일 폴리쉬는 한 박스에 약 30kg, 다양한 색을 담다 보니 10박스가 넘어갔다. 몇 시간 동안 힘겹게 박스를 포장하고 차에 실었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는데, 거래처 측에서 물건 값을 현금으로 줄수 있다며 은행에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도저히 나갈 수 없었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 나 캐쉬로 만불넘는 돈을 받아야 하고 은행에 같이 가야 한다고 하는데 도저히 나는 나갈수 없고 그럼 그냥 돈을 나중에 받는 걸로 하고 거래처 사람을 보내야 겠다."
1분도 안 돼서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돈을 나중에 받는 게 아니다 내가 얼른 갈게."
돈이라도 받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이미 너무 지쳐 몸져누웠다. 그리고 계속 토했다. 처음엔 짙은 암갈색이던 것이 점점 빨갛게 변했다. 아... 지금 내가 피를 토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남편은 내가 토해놓은 것들을 보고선 이렇게 아픈데 왜 진작 연락하지 않았냐며 뭐라고 했다.
'전화 했자나...니가 안받았자나 개새끼야!!!'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는데 기운이 너무 없으니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옆에 쓰레기통을 갖다 주며 여기다 토하라고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너무 피곤했다.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었다. 밝은 햇살에 눈이 떠졌다.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대로 넘어지면서 벽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며 쓰러졌다. 너무 놀랐다. 평소처럼 몸을 돌려 다리를 땅에 디뎠는데 땅이 디뎌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리는 너무 아팠다.
겨우 손을 뻗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운동 중"이라는 문자가 왔다. 아... 진짜. 너무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근처에 계셔서 금방 달려와 부축해주셨고, 겨우 화장실을 다녀왔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머니가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내시는 소리가 들렸다. 다 귀찮았다. 어머니가 뭔가 먹으라고 가져오셨지만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남편을 호출하시고 도착한 남편에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시고는 가셨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남편은
"임신하면 입덧도 하고, 토를 많이 하면 피가 나올 수도 있지. 뭘그렇게 유난이야" 했다.
그런가? 피가 나오는 게 그럴 수도 있는 건가? 내가 유난인건가? 뇌가 기능을 정지한것같다. 이게 맞는말인지 틀린말인지 화가 나야하는지 미안해야하는지 상황이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그래도 동네 병원에 한번 가보자"며 나를 데리고 갔다. GP 의사는 내 상태를 보더니 당장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남편은 당황해서 얼른 응급실로 나를 들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