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1944년 5월 자신의 고향 쯔가루 지역의 구석구석을 기행 하게 된다. 그래서 집필한 소설이 쯔가루. 소설 쯔가루에서 특히 재밌는 부분이 절친 N군과 함께하는 가니타에서 닷삐까지의 소토가하마 여정. 민먀야에서 소토가하마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닷삐까지는 배로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날씨 탓에 결국 걸어서 이동. 비포장 도로에다 바람도 거센 닷삐까지의 바닷가길 이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소설 쯔가루에 다자이의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그 길을 달리는 마라톤 대회가 있다고 해서 참가해보았다.
닷삐에서 바라본 쯔가루 해협. 건너 편은 북해도
8월 한국에 가 있을 때 지인 S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닷삐, 요시츠네 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출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언제, 어디서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다. 보내온 마라톤 정보를 보니 2km 코스, 5km 코스, 12km 코스였고, 대회명이 닷삐요시츠네 마라톤 대회이며, 캐치플레이즈가 '다자이가 걸었던 길을 달려요'였다. 내가 다자이 오사무의 쯔가루 기행에 관심이 많고, 특히 소토가하마 지역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걸 아는 S 씨가 함께 달리자고 제안한 것이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달려보자고 답을 했다. 왜 12km일까 의문이었는데, 다자이가 걸었던 민마야에서 닷삐까지의 해안가 거리가 딱 12km였다.
9월 2일 아오모리로 돌아와서 약 한 달 동안 마라톤 대회를 준비했다. 10월 9일 아침, 마라톤 대회 개회식이 있는 민마야체육관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 같은 숙소에 거주하고 있는 S선생님이 응원차 함께 나섰다. 도착해서 함께 달리기로 한 S 씨를 만나 접수를 마치고 일정을 안내받았다. 실내 체육관에서 개회식이 열렸는데, 지역의원, 소토가하마정장(우리니라 읍장 정도), 지역 관계자들, 초대 마라토너 겸 가수 등이 인사도 하고, 축하곡도 불렀다. 코로나로 인해 4년 만에 개최되며, 원래 8월 달에 개최했는데 이번에는 10월에 개최하게 됐다고 한다. 이번엔 아오모리도 이상기온으로 그 더워가 예년과 달랐는데, 10월에 개최하길 잘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개회식이 끝나고 내가 참가하는 12km 다자이 코스 런너들은 버스를 타고 닷삐까지 이동했다. 10시 20분 시작인데 닷삐에 도착하니 9시 35분이었다. 닷삐에는 몇 가지 명물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일본 유일의 '계단 국도'이다.
이 국도를 올라가면 일본의 국민 여가수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를 있게 해 준 쯔가루 해협 겨울 경치(津軽海峡·冬景色)라는 노래 기념비가 있다. 워밍업 한다는 생각으로 걸어 올라보니 약 10분이 걸렸다. 올라보니 쯔가루 해협이 펼쳐져있고, 기념비에서는 그 유명한 노래가 언제나처럼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쯔가루 해협 겨울 경치 기념비. 중간에 빨간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잠깐 둘러보고 마라톤 스타트 지점으로 내려갔다. 스타트 지점에는 짐을 맡길 수 있는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달리게 되는 다자이 코스는 반환점이 없이 닷삐에서 출발하여 골인 지점인 민마야 체육관 앞에서마무리하게 된다. 그래서 출발 지점에서 짐을 맡기면 골인 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짐을 맡기고 몸을 풀고 대기했다. S 씨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몸을 풀었다.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많은 런너들에게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우선 몸에 불필요한 살이 없이 아주 날씬했다! 언제든, 얼마든 달릴 수 있는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복장이라든지 장비들에서 폼이 느껴졌다. 러닝화, 모자, 선글라스까지. 역시 고수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디어 출발을 준비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스타트 라인으로 참가자들이 모였다. 마라톤이라 그런지 길게 늘어서서 출발을 준비했다. 나와 S 씨는 중간 정도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건투를 기원하며 시간에 맞춰 출발!
개인적으로 이번 마라톤 코스에서는 두 가지를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오버하지 말기, 힘 빼고 달리기. 스타트를 시작하자 선두 그룹은 쏜살같이 치고 나갔다. 참고로 대회기록을 보니 12km, 40분 2초였는데, 이는 다른 경지에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나는 내 수준에 맞게 천천히 달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처음에 무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대략 중간 정도에 위치해서 달려 나갔다. 혼자 달릴 때 보다 훨씬 달리기 편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닷가를 달리기 때문에 그런지 기분도 상쾌했다. 다행히 날씨도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할 때 앱을 켰는데 중간중간 달린 거리와 시간을 알려줬다. 2km를 무리하지 않고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10분 이내에 통과했다. 즉, 1km/5분 이하 페이스이다. 이 정도면 개인 기록인데? 3km 정도 지났을 때 페이스를 조금씩 올렸다. 앞에 런너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대략 감을 잡고 달렸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추월할 수 있는 사람은 추월했다.
중간중간에 지역 주민들이 나와 열심히 응원을 해주었다. 대부분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었다. 간혹 어업을 준비하며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지역 안내 방송을 통해 마라톤 가두 응원을 몇 번이고 독려했다고 한다. 중간에 물호수를 들고 물을 뿌려주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두 번 정도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물을 마실까 말까 망설이다가 혹시 몰라 마셨는데, 두 번째 마셨을 때는 물을 잘 못 마셔 가볍게 사레가 걸려버렸다. 마시려면 이 또한 연습이 필요하겠으며, 잘 못 마시면 안 마시느니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5km 지점을 헉헉대며 지나고 있는 미꾸라지. 응원하던 S선생님이 촬영한 동영상의 스크린샷
12km는 긴 거리도 아니지만 짧은 거리는 아니다. 열심히 열심히 달려 8km..., 9km..., 10km..., 아직 2km나 남았네. 헉헉, 드디어 11km..., 1km만 더 달리자! 저기 끝이 보인다. 헉헉, 조금만 더 힘내자... 500m..., 기록을 생각하면 젖 먹던 힘까지 낼까? 아냐 무리하지 말자. 충분히 힘들다... 300m..., 100m..., 50m, 30m, 20m, 10m!
골인!
완주했다! 기분 최고!!! 워매 숨이 차 죽겠네, 헉헉.
이런 느낌이었다.
결승점(좌)과 번호표에 달렸던 칩을 반납하면 완주증을 교부하는 부스(우)
어떻게든 완주했다. 기록도 나쁘지 않았다. 번호표에 칩을 달고 달렸는데, 완주 후 뜯어서 바로 칩 반납 부스에 반납했다. 그랬더니 즉석에서 달리기 완주 증명서에 이름, 코스, 완주 기록, 당일 날씨 등이 적힌 증명서를 발급해 줬다. 기록은 57분 10초! 이건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기록이었다. 12km 코스이므로 약 1시간 10분에 통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빠르면 1시간 5분 정도 생각했는데 57분에 통과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도 기록을 측정했는데 대략 1km 4분 59초에서 4분 30초 페이스로 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꽤 연습을 했고 몇 번 기록을 재 봤었는데 1km를 5분 이내로 달려본 적이 없었다. 역시 많은 사람이랑 함께 달려 페이스가 좋게 나왔나 보다.
다자이 오사무가 걸었던 길을 달린다, 닷삐/요시츠네 마라톤 2023, 완주증
코스도 좋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 다음에도 꼭 출전하자고 지인과 다짐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대회를 출전하기로 했다. 42km 풀코스는 너무 길어 지겹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해서 달리는 과정도 힘들겠지만 훈련도 너무 빡세게 해야 하지 싶다. 그래서 봄에는 하프 마라톤 대회를 노려보기로 했다.
km/페이스, 시작 1km4분59초 페이스, 마무리는 1km4분30초 페이스(좌) 닷삐에서 민마야까지 달린 거리가 지도 위에 표시(우)
마라톤 대회는 처음 참가해 봤지만 준비하며 체력도 끌어올린 것 같고, 실제 코스에서 다자이가 걸었던 길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어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에 시내에서 다시 만나 뒤풀이를 했는데 맥주도 꿀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