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히로사키의 한 대학에서 회의가 있는 날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회의. 아오모리에서 히로사키까지는 교통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보통 자차로 이동하고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이 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알아보니 두 시간 넘게 걸렸다. 그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 이유는 회의 후 T선생님 집에서 식사 겸 술을 한 잔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술 때문이다.
T선생님이 오래전부터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교사를 정년퇴직하시고 개인 연구 활동과 사회활동을 하시는 이 분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집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하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사모님이 한국 드라마 광팬. 몇 번 방문하려 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 방문하기로.
내가 사는 곳에서 히로사키 대학까지 가기 위해서는 먼저 버스를 타고 아오모리 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집에서 아오모리 역까지 40분 정도 소요된다. 버스를 탔다. 버스 앞 쪽 왼쪽에 앉은 한 할머니가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를 받으신다. 일본의 경우 버스와 지하철에서는 통화를 하면 안 된다. '어 안될 텐데.. 할머니라서 그냥 내버려 두나?' 생각했는데, 버스 기사가 휴대폰은 진동으로 해두고 대화는 삼가해달라는 안내 방송을 날린다. 버스요금은 440엔. 출장이므로 혹시 영수증이 있는지 물어보니 역시 없다고 한다.
아오모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히로사키로 이동. 시간이 조금 있어 히로사키 역 내에서 T선생님 댁에 가져갈 술과 안주거리 살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히로사키 역과 연결된 쇼핑센터 1층으로 내려가니 술과 간단한 안주를 파는 곳이 있었다. 술의 종류가 많지 않아 좀 더 큰 술 가게가 있으면 그곳에서 사고, 만약 없으면 이 쇼핑센터에서라도 사면되겠다고 생각했다. 쇼핑센터에 도넛 가게와 라면 가게가 있어 간단한 식사가 가능했지만, 대학까지 이동하는 중에 맛있는 가게가 있을 수 있고 대학 식당을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기에 목적지를 향했다.
앱을 이용해서 히로사키 대학으로 향했다. 1.7km. 요즘은 앱이 발달해서 걸어가는데도 거의 자동차 네비와 비슷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역을 조금 지나니 아트 호텔이 있었고 모퉁이에 아트호텔 카페가 있었다. 카페에 어떤 메뉴가 있는지 보니 애플파이가 있었다. 히로사키는 사과가 유명해서 그런지 애플파이도 유명하다. 호텔에는 세 종류의 애플파이가 있었다. 제일 싼 게 제일 맛있어 보여 251엔 짜리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따뜻하게 데워달라고 하니 아래와 같이 잘라서 데워주었다. 나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려 진열장에 전시된 작은 애플파이를 하나 더 주문하려고 여쭤보니, 진열장에 있는 애플파이는 테익아웃밖에 안 된다고. 그냥 놔두라고 했다.
아트 호텔 애플 파이(좌) 히로사키시의 애플 파이 맛집 안내(우)
주문한 애플 파이기 나와서 먹어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배가 안 고픈 상태였는데 하나 더 주문했다가는 곤란할 뻔했다. 애플파이를 맛있게 먹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25분 정도는 걸어갔는데 동네 분위기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운동도 됐다. 걸어 다니는 것도 참 괜찮구나 새삼 느꼈다. 날씨도 걷기에 딱 좋았다. 참고로 히로사키는 아오모리시보다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다. 히로사키성은 한국 드라마에서 촬영장으로 사용 됐다 들었다.
회의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약 30분에 끝났다. 30명 정도 사람들이 멀리서 모였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자 주최자도 머쓱해했다. 회의가 끝나고 다시 역으로 오니 아직 2시 30분 정도. 4시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아트 호텔에 가서 애플파이를 하나 더 먹을까,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울지 고민됐다. 그러고 보니 지인이 운영하는 유기농 레스토랑이 히로사키 역 근처였다. 히로로라는 쇼핑센터 근처였고, 마침 내가 걸오 나온 길에 히로로 쇼핑센터가 보였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는 차로 이동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다녔다. 히로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 레스토랑이 안 보였다. 포기하고 역으로 발길을 돌려 걷다 보니 익숙한 거리가 나왔다. 알고 보니 그 레스토랑은 히로로에서 히로사키 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유기농 레스토랑
레스토랑 가까이 가보니 간판은 나와있는데 불은 꺼져 있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손님 한 명이 앉아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인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리를 안내한다. 마스크를 벗고 인사를 하니 그때서야 인사를 한다. 역광 때문에 못 알아봤다고. 메뉴를 물어보니 차도 있고 식사도 있다고 한다. 간단하게 차를 마실까 생각하다가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응원하는 차원에서 런치와 차를 주문했다. 곧 다시 술자리가 있을테니 양을 적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갈하고 건강한 식사가 나왔다.
이 분은 무역 관계 일을 하시다가 몇 년 전부터 유기농 음식, 아오모리 전통 음식에 관심을 갖고 결국 유기농 레스토랑까지 오픈했다. 처음에는 무역 일과 식당을 병행하며, 시간이 될 때만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지금은 레스토랑에 거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숙면에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숙면에 도움이 될 테니 마셔보라고 Kuromoji(털조장나무) 차를 선물로 주셨다.
T선생님 댁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3시 45분이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히로사키 역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서 근처 술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히로사키 대학 쪽에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갈 시간이 없어 그냥 역 내의 쇼핑센터에서 봐뒀던 술과 안주 몇 가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가보니 T선생님이 나와계신다. 차를 타고 선생님 자택으로 이동했다.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신다. 그러니 사모님이 나와서 문을 열고 반겨주신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많은 음식을 준비하셔 미안할 정도였다. 이렇게 준비한 줄 알았으면 먼저 방문한 식당에서 차만 마셨을 텐데...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었다. 오늘의 메인은 와인. T선생님은 와인 전문가이다. 와인 엑스퍼트라는 자격이 있다고 한다. 와인소믈리에는 술을 제공하기 위한 자격이고 와인엑스퍼트는 와인을 즐기기 위한 자격이라고 하는데 와인엑스퍼트 자격을 힘들게 취득했다고 몇 번 자랑을 하셨다. 오늘 준비한 와인은 칠레 와인. 진한 맛과 연한 맛의 와인을 준비해서 비교하면서 마실 수 있었다. 포도 품종, 지역의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이준기
사모님은 한국 드라마 광팬이었다. 매일 드라마를 보는데 특히 이준기 나오는 드라마는 안 빼고 본다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궁금증을 물어보신다.
이준기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아요?
옛날에는 많았는데 요즘은 어떤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ㅎㅎ
술 마실 때 고개를 돌리고 마시는 거 같던데 왜 그러는 거예요?
연장자나 상사와 마실 때는 그렇게 해요
둘 다 고개를 돌리고 마시기도 하던데요?
둘 다 어려운 상대와 술 마시면 그렇게 하기도 해요
아 그렇군요.
한국 사람들은 감정 표현이 좀 직설적이고 풍부한 거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에 비해 좀 그런 편이죠.
일본 사람들도 좀 그랬으면 좋겠어요. 부러워요.
그래서 한국을 아시아의 라틴 아메리카라고 하기도 하죠.
(두 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래! 정말 그런 거 같아요! 딱 맞는 비유네요!
정명훈
T선생님은 클래식, 특히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는 게 또 다른 취미라고. 특히 정명훈의 오랜 팬이라고. 정명훈이 동경 공연을 왔을 때 제일 앞 좌석표를 구매해서 끝나고 바로 달려 나가 악수까지 했던 일화를 소개하시면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비디오를 보여주신다. 정말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국인이라고. 지휘자에 따라 완전 다른 음악이 되는데 정명훈의 강약 조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신다. ('요즘 한국에선 뉴진스가 대세죠!' 라고 요즘 내가 좋아파는 뉴진스와 디토의 매력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고:<내가 만약 LG 홍보담당자라면 (brunch.co.kr)>.
T선생님은 1989년도에 한국 부여와 경주를 여행해 본 후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때 구입한 호돌이 인형을 보여주시면서 호돌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시길래 친절히 설명해 드렸다. 사모님은 한국 드라마 광팬이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아래의 오른쪽 요리 키리단뽀뽀라는 아키타 지역 요리를 준비해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다. 쌀떡같은게 들어있는 아키타 지역 요리인데 사모님의 출신지가 아키타라고.
7시가 되자 예약해 놓은 택시가 왔다. 히로사키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되고 여기 아오모리는 대중교통이 일찍 끊겨 서둘러야 한다. 거실 소파에 가득한 인형들이 "좀 더 놀다가~, 한 잔 더해~"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