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계절

다시 찾아오는 여름처럼 겨울처럼

by 경년

몇 년 전 어느 날엔가, 나는 희미해지려는 삶을 견디지 못해 애써 시간 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고 했다. ‘굳이’ 무언가를 하는 일상, 어쩐지 흘려보내는 게 못내 싫어 약속을 잡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며 인생이 윤택하고 풍요롭다고 여기는 삶, 그런 삶 말이다. 겉으로 보면 모범답안처럼 보이는 그 하루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점점 더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성실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하던 어느 순간, 내 안의 불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누가 봐도 '갓생'을 살고 있었는데도 내 하루는 무언가로부터 발이 푹푹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버둥대는 나는 어느새 침대 밖조차 나오지 못하는 놈이 되어 버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좌절이었고, 발에 밟히는 모든 게 허무였다. 내가 왜 이런지 이유도 모른 채 끝도 모를 늪에 며칠인지도 모르게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이 긴 성장통 같은 우울 속에서 나는 하나는 분명히 배웠다.

시간이 약이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약발이 들 때까지 견딜 힘이 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 한 것은 뜻밖에도 '샤워'였다. 아무것도 아닌 그 일이,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자기 다짐이었고, 내가 나를 아끼는 첫 몸짓이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릴 때, 나는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을 조금씩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 깊고 어두운 바다에서 올라온 뒤, 나는 계절처럼 일 년에 한두 번씩 얕고 깊은 우울이 찾아온다. 하지만 한번 겪어본 뒤론 그 끝이 분명히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 이유를 캐묻지 않게 되었다. 그저 감기처럼 또 지나가리라, 몸이 약해져서 그런 것이니 쉬면 나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내가 ‘우울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같았다—샤워를 하는 것.


우울과 불안은 조금씩 젖어드는 바짓단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처음엔 그냥 좀 찝찝하고 불쾌하게만 느껴지다가, 어느새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면 숨이 헐떡이기 시작한다. 그러곤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를 찾다가, 또 원망할 것을 찾다가, 그러다 지쳐서 일어날 힘조차 갖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럴 때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며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잠자고, 굶어 죽겠다 싶을때즘 밥 챙겨 먹고, 그렇게 버티다가 샤워를 한번 해보자. 잠은 삶에 쓸데없는 잡다한 걱정들을 잊게 해주고, 굶어 죽겠다 싶을 때 먹는 한끼는 ‘살아 있음’의 소박한 이유를 되돌려 준다. 그리고 따뜻한 물과 비누로 온몸을 씻어낼 때, 오래되었던 걱정들이 물에 풀려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아주 작은 치유의 순서다.


내 청춘의 장면들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꼭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람들은 청춘은 비단 봄날의 따스한 햇살 같고, 여린 잎의 푸르름 같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청춘은 조금 달랐다.

내가 사랑하는 푸른 계절에는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견딘 흙속의 새싹이 있고, 황량한 들판에서 새끼들을 물리며 버텨온 텃새들이 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피어나는 붉은 동백처럼, 내 청춘은 상처와 버팀 위에 핀 빛이었다. 그 생채기들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이 이야기들을 꺼내어 적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순간을, 작은 치유의 순서를 따라 다시 주워 담는다.

이 조각들을 희미해지기 전에 적어두는 일은, 자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약속이다. 누군가의 말로 아름답게 포장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흠집과 흙냄새까지, 내 청춘의 자국을 손으로 더듬어 채워 넣는 일이다. 언젠가 이 기록을 꺼내 읽을 때, 그 모든 시간을 양분 삼아 피어낸 오늘을 돌아보려고 한다. 그러니 유독 힘든 요즘을 보내고 내가 나를 자꾸만 미워하고 있다면, 지금은 지나가는 겨울일 뿐이며, 이 계절이 가고 나면 또다시 푸르게 빛날 당신을 상상하며 오늘을 버텨주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의 푸른 봄을 살아가자.



야경은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 따스한 햇빛은 사라졌지만 도로의 무심한 불빛들이 서울의 밤을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202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