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부자의 여행

by 향글

여행의 참맛은 종종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낯선 곳에서 빡빡하게 스케줄을 소화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때 보다 귀국 후 사진첩을 넘기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이 더 큰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 그래서일까?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환경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여행이 선사하는 특별한 경험과 소중한 추억을 위해 기꺼이 다시 가방을 싸고 길을 나서게 된다.


작년 여름 치앙마이로 한 달 살이를 다녀왔다. 한 달 살이를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와~ 좋았겠다. 힐링도 실컷 하구"

"한 달 동안 뭐 했어? 지루하지 않았어?"

힐링과 지루함이 공존했고 돌아올 때쯤에는 한식이 몹시 당겼지만 기회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다시 가리라.

모든 사건에 의미를 찾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목적이 있어야 하는 삶에 신물이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달살이를 했었다. 여권에 '꽝' 도장 직고 관광명소를 숨 가쁘게 둘어보는 휴가와는 차원이 다른 여유로움이 가득한 경험이다. 더 많은 맛집을 탐방하고, 더 많은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이 한 달 살기의 매력은 아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일상에 쉼표를 찍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풍성해져서 시간 부자가 되어 유유자적할 수 있다.


나는 숙소에 묵으면서 매일 수영을 했는데 수영장에는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보다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따뜻한 햇볕아래 하릴없이 누워 잠에 빠지거나 책을 읽는 등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서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만 있었다. 태국 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국가에서 온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데 서양인들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은 참 인상 적이었다. 별로.. 하는 게 없다.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수영장에 나와 햇볕을 쬐며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배고프면 밥 먹으러 가는 것이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해가지면 밤에 나와 야시장을 돌며 구경하기도 한다. 가끔 쿠킹 수업이나 요가를 하러 가기도 하고 개인 취향에 따라 더 깊은 자연 속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명한 관광명소를 가거나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무더운 날씨에도 옷을 갖춰 입고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거나 일출을 본다고 새벽부터 서두르거나 일몰을 봐야 하니 시간을 맞춰야 하는 여행은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테라스에 나와 앉아 일출은 아니지만 그곳의 아침이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다 마침 예쁜 카페가 있으면 들어가서 차를 마시고 마침 시간이 맞아 일몰을 볼 수 있으면 대충 자리 잡고 앉아 일몰을 보거나 했다.


우리도 그런 한 달 살이를 했다. 일정을 짜 놓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그날 하고 싶은 거 하나씩 천천히 수행했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하다.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가 하는 죄책감이 생기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 몸이 들썩이지만 그 마음들을 내려놓아야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따뜻한 햇살에 덥혀진 수영장에서 둥둥 떠다니며 귓가에 꼬르륵꼬르륵 들리는 물소리에 휴식을 취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람이 실어다 주는 풀내음을 맡으며 가만히 세상을 보는 것도 훌륭한 휴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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