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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푸치 Jun 21. 2024

갑상선암이 내게 알려준 것들

20대 후반, 성큼 찾아와 버린 갑상선암 덕분에 나는 그동안 늘 꿈꾸고 바라기만 했던 것들에 한 발자국씩 성큼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암 판정을 받은 2020년,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괜스레 망설여졌던 한국소아암재단에 정기후원을 곧장 신청했다. 이제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항암치료과정과 그 또래들만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추억과 경험을 병원생활과 맞바꿔 생활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거창하진 않지만 작은 금액이 모이고 모이면 지원을 받아도 감당해야 할 것이 많은 어마어마한 병원비에 눈곱만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뒤돌아보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정기후원은 내게 삶의 끈을 더욱 단단히 묶을 수 있게 하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내 삶에 대한 건강한 책임감을 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생명의 소중함과 책임을 더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삶이 더 힘이 들 때마다 기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소년소녀가장을 위해서, 베이비박스 아기들을 위해서, 유기동물들을 위해서. 그리고 2021년과 2023년에는 지파운데이션이라는 후원단체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국내 아동과 1:1 결연을 맺어 아동이 성인이 될 때까지  후원을 하는 인연을 맺었다.




금전적으로는 더 지출이 생기는 부분이었지만 마음은 넘치도록 차올랐다. 비록 액수적인 면에서는 소소하기 그지없지만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나 또한 여러 사람들의 지원과 후원을 받았기에 조금이나마 환원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꽤나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은 생각으로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그 소망을 실행에 옮기니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다.


그렇게 나는 늘 생각만 하고 계획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봤다. 결과는 놀라웠다. 무려 10년 가까이 매번 같은 꿈과 목표, 계획을 바라고 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진전된 것은 없었다. 나는 매년 새해가 되면 새해 목표를 적고, 방학이 되면 방학 계획을, 또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버킷리스트를 습관처럼 적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시도도 도전도 성장도 발전도 없었다. 왜 그런지 원인을 생각해 봤다.


‘돈이 없나?’

일을 시작하기 전엔 그랬을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돈이 들더라도 충분히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고 아깝지도 않았다.


‘그러면 시간이 없나?’

어느 정도는 그랬다. 경력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돈도 조금씩 모아졌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경비가 마련되었지만 정작 여행 일정을 잡기가 어려워 늘 여행은 뒤로 미뤄졌다. 그런데 시간은 쪼개 쓰면 되는 것이었고 시간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 능동적인 삶을 산다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시간도 돈도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가 가장 큰 문제였을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었다.


‘눈이 안 보여서 어려울 것 같은데 할 수 있을까?’

‘몸이 불편해서 하기 힘들 것  같은데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두려움


하지만 언제까지 막연한 꿈만 꾸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홈베이킹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빵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베이킹을 할 때는 정확한 계량이 중요했고 오븐의 온도도 잘 봐야 했다. 분명 계량기의 숫자와 오븐온도계의 눈금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되든 안되든 실천을 하기 위해 무작정 미니오븐과 각종 도구 그리고  재료를 샀다.


그 결과 도시락케이크에서부터  마들렌, 머핀, 쿠키, 마카롱, 애플파이, 식빵, 모닝빵, 바스크치즈케이크, 스콘 등을 만들 수 있었다. 만드는 과정에서 기초 이론과 실기가 부족해 엉망인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고 노력과 정성을 가득 쏟은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만드는 과정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재료 계량을 할 때는 숫자가 보이지 않으니 핸드폰 카메라의 줌을 확대해 계량을 맞췄고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을 때는 목소리 더빙이 함께 들어가 있는 영상 위주로 열심히 찾아야만 했다. 디지털 오븐이 아니었기에 빵이 구워지는 내내 오븐 앞에 앉아 카메라로 오븐온도계를 수시로 찍어서 오락가락하는 온도도 조절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느낀 것은 비록 시간이 더 배로 들고 번거로울 수는 있으나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다른 방법을 통해 홈베이킹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양이 조금 어설프고 맛이 조금 예상했던 맛과는 달라도 그 나름의 매력과 느낌이 있었다. 또 무엇보다 직접 홈베이킹을 해보니 눈과 입이 즐거운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들의 엄청난 노고와 예술성을 절절이 느낄 수 있었다. 홈베이킹을 통해 나는 목말랐던 어릴 적 꿈을 조금이나마 실현할 수 있었다.




갑상선암 판정 이후 또 내가 도전한 분야는 영어였다. 나는 일반학교에 다녔을 때 늘 학업이 부진했고 영어와 수학은 기초가 전혀 없었다. 공부에 대한 한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늘 숙제처럼 영어 배우기가 목표로 따라붙었다. 영어를 독학으로 하기엔 금방 포기할 것 같아 숨고 어플을 통해 화상영어 강사님을 구해 영어과외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파일로 받는 자료를 보기가 어렵고 강사님과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진 못했지만 그 뒤로도 아는 지인을 통해 전화영어과외를 받았다.


나는 기초가 없었기에 성인이었지만 파닉스부터 시작했다. 영어를 배우면서 느낀 것은 모름에 대한 창피함은 잠깐이었고 새로움이란 배움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학창 시절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내용을 배웠을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만큼 노력과 꾸준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영어 외에도 숨고에서 바이올린 개인 레슨 선생님을 구해 한동안 개인레슨을 받기도 했다. 학교에서 특색사업으로 오케스트라활동을 하고 있어 늘 바이올린 레슨은 후원자분들의 지원으로 비용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개인 레슨선생님을 구해 레슨 비용을 지불하다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새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시각장애인들의 음악적 재능과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우직하게 후원을 이어나간 귀한 분들에 대한 감사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외에도 늘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는 피아노를 전공한 아는 동생에게 원데이 레슨을 받고 당근마켓에서 디지털 피아노를 중고로 사서 독학으로 연습했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어 악보를 볼 줄 알았지만 피아노를 치면서 악보를 볼 수 있는 시력은 되지 못했기에 청음으로 계이름을 쳐보거나 유튜브에 나와 있는 피아노 연주 영상을 초마다 끊고 멈추며 악보와 손가락 위치를 확대해 보면서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모든 과정이 하나하나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좋았다. 그 뒤로 나는 칼림바에 한참 빠져 마푸치친구에게도 칼림바라는 악기를 소개해주었고 칼림바에 입문하게 된 마푸치친구는 학교에 칼림바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나는 함께 무엇인가를 배우고 소통하는 것에 대해 큰 성장감을 느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버킷리스트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같이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함께했다.


그렇게 10년 내내 늘 드럼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친구와 함께 드럼 원데이 클래스를 함께 했고 앙금플라워케이크를 만들고 싶어 했던 친구와는 떡케이크를 만들러 갔다. 공통된 관심사가 있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좋았지만 갑상선암을 진단받고 나서는 혼자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큰 즐거움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예쁜 꽃을 만지며 꽃다발을 만들 때가 그랬고 등나무 줄기를 엮어 생활용품을 만드는 라탄 공예가 그랬다. 꽃다발을 만들 때도 라탄 공예를 할 때도 생각했던 것보다 손을 많이 쓰고 힘을 줘야 하는 경우가 많아 작업을 끝내고 나면 손에 통증이 생겨 아팠지만 만드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았다. 라탄공예는  원데이로 시작했다가 너무 재밌어서 정규과정 클래스까지 수강하고 자격증반도 고민할 정도로 매력적인 분야였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배우고 싶다는 열정이 있음에 감사했고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얻어 평온함을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었다. 경험을 통해 각 분야에 대한 흥미와 이해도가 높아졌고 하나하나 배워나갈 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짐을 느꼈다. 드럼 원데이 클래스를 통해 리듬과 박자에 맞춰 드럼을 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닫고 거리로 나갔을 때 들려오는 사물놀이의 신명 나는 풍물소리가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라 엄청난 예술과 노력임을 느꼈던 것처럼. 구석구석 세상의 색이 칠해지는 느낌이었다.


암을 진단받고 내게 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 과목 중 체육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뼈의 변형으로 팔이나 손의 기능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어 제한적인 동작이 많았고 뼈가 약해 위험하거나 충격이 가할 수 있는 운동은 할 수 없었다. 또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난 팔의 모양이 별로 예쁘지가 않아 짧거나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해야 하는 운동은 하고 싶어도 늘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폴댄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음악에 맞춰 예쁜 옷을 입고 봉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뒤이어 든 생각은 폴댄스 의상은 죄다 노출이 심한 옷이었고 그러한 의상은 변형된 팔이 다 드러나서 입기가 꺼려진다는 것이었다. 걱정도 고민도 되었지만 배움에 대한 마음이 더 컸기에 폴댄스학원에 등록을 했다. 폴댄스강사님께 내 신체적 특징에 대해 말씀드리고 상담을 받은 후 나는 되도록 팔의 마찰이 아닌 다리나 배와 같은 다른 신체부위의 마찰을 통해 할 수 있는 동작을 배우기로 했다. 폴댄스는 봉과 피부의 마찰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부가 많이 드러난 의상을 입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팔을 마음 편히 노출할 수도 팔에 힘도 없기도 해서 다리와 배의 힘으로 폴댄스 동작을 해야 했다. 몸에 멍이 들 것처럼 봉에 마찰되는 게 아팠지만 동작에 성공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때면 엄청난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보다 멀미가 너무 심하게 났다. 그래서 폴댄스는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우선 시도라도 해봐서 미련이 남지 않았고 직접 경험을 통해 내게 맞지 않는 운동임을 느꼈으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내가 염려하고 가지고 있는 콤플랙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인 멀미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향해 바라보고 있던 색안경이 조금씩 벗겨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내 안의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놓고
시도한다면 세상은 드넓고 깊은 모습을
내게 언제든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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