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편
9월이 되자 실어증은 느리지만 꾸준한 재활을 통해 점점 회복되고 있는 듯했다. 수술하고 지난 3개월 동안 느낀 건 나는 치열하게 재활하고 있는 데 남들은 기다려줄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묵묵하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좌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여자친구 직장동료들이 밴쿠버 본사에서 출장을 와서 여러 고객사들과 같이 식당을 빌려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여자친구 파트너로서 초대되어 참석했고 여자친구 상사, 동료들도 처음 보는 자리고 더군다나 고객사들과 함께 하고 있어 내가 혹시라도 말이 잘 못 나오면 어떡하나 더욱 떨렸다. 항상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원래라면 말도 잘했겠지만 수술 후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누가 말이라도 시키면 어떡하지 하며 더 걱정했던 거 같다. 우려했던 데로 고객사들 중 한 기업 대표가 말을 건네어 왔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현재 수술로 인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뿐더러 기억력에도 문제가 있는 점을 미리 양해 구하며 힘겹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40대 후반 정도에 허세로 가득한 중년 남자였다. 은연하게 본인 주장만 하고 본인 얘기만 하고 어디를 후원하고 있는지 등을 표출하고 싶어 하며 딱 봐도 가진 재력과 인맥을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 실제로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도 나지 않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고 초지일관 나의 대답은 같았다.
“제가 수술 때문에 기억이 잘 안 나서…”
분명 답은 아는데, 기억하고 설명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때 기업 대표의 비웃음과 조롱하는 것을 은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부 기억나지 않아서 좋으시겠어요?”
내가 언어와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를 적출했음을 밝혔는데도 그런 말을 건네다니 되려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은 의도적이었고 나는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의 상사, 고객사들로 둘러 쌓여 있기도 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겼다. 기업 대표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내가 대꾸도 없고 대화가 영양가가 없었다고 느꼈는지 선약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이 순간 새삼 사람 성품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 몰라도 수술하고 나선 다시 한번 내가 뇌종양 환자라는 것을 일 깨워준 말이었다. 더불어 저 말은 나뿐만 아니라 여자친구의 마음고생까지 3초간의 짧은 한 마디에 무너뜨리는 무례함으로 가득 찬 말이었다. 그런 무례함을 이제 온전히 내가 감당하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고 덕분에 이전보다도 사람 만나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반대로 나의 말에 상처받았을 사람들이 떠오르며 반상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나나라고 해서 북미 화 된 동양인 1.5세, 혹은 2세들을 비하하는 말이 있다. 바나나처럼 겉으로 봤을 때는 누가 봐도 노란 동양인이지만 속내는 하얀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나는 ‘바나나 크리스천’이었다. 겉으로는 교회도 오래 다녔고 찬양팀에 소속되어 있어서 믿는 거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참고로 먼 땅으로 이민을 와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의지할 곳이라곤 ‘종교’ 밖에 없다. 우리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2008년 1월 당시 우리는 교회와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에 정착할 수 있었다. 오타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 7위권 안에 들기도 하고 간혹 북극보다도 춥고 체감상 반년 간의 겨울이 지속되어 처음에는 예쁘고 신기하던 눈이 질릴 정도였다. 실제로 겨울 스포츠로 스노보드 타기를 즐겼는데 지금은 전혀 타고 싶지가 않다. 당시 캐나다 거주 재외동포 인구수가 거진 80만 명 정도였는데, 2016년에도 오타와는 2천 명뿐으로 비교적 매우 적은 숫자였다. 때문에 한 다리 걸치면 전부 아는 사람이고 교회와 성당을 포함해서 4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 친구들은 조금 더 큰 도시인 몬트리올, 토론토, 밴쿠버를 가거나 되려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기도 했다.
같은 교회를 다니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마쳤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봉사활동 40시간을 이수해야 하는 데, 성가대나 찬양팀을 하면 봉사활동으로 인정해 줘서 하기도 했고 당시 일렉트릭 기타에 빠져 있었는데 연습도 할 겸 찬양팀에 들어갔다. 일요일에 할 것도 없고 교회가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마지못해 가는 것도 있었지만 교회 마치고 하는 축구, 소프트볼, 탁구 등이 재미있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머니가 일정 금액을 지원해 준다고 해서 아이티를 방문하게 됐다. 해외 봉사활동이 꽤나 폼이 나 보였기도 했고 내 오랜 염원이었기 때문에 “이 김에 가면 좋겠네”라 생각했다. 가는 것도 온라인 신청을 했어야 해서 신청하고 준비 기간 동안 각종 예방접종을 하고 2주간 아이티 목사님 댁에 있었다. 공항에서 목사님 댁으로 가는 길은 전도사님이 운전을 해주셨는데 푹푹 찌는데 에어컨도 사용 못 하는 불쾌한 날씨에 질서가 있는 듯 없는 교통상황을 마주했을 땐 신세계를 보는 듯했다. 도착하고 하루 적응한 시간 빼고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에 임했고 뙤약볕에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 일하는 동안 즐거웠고 열악한 환경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이티에서의 하루 일과는 새벽기도, 아침식사 후 학교 설립을 위한 막노동을 하거나 보건소 가기였다. 학교를 지을 땐 조금 더 멀리 갔는데 그야말로 막노동을 했다. 철근을 나르거나 학생들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개인적으로 남들 앞에서 가르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던 나는 막노동이 적성에 더 맞는 듯했다. 보건소를 갔을 땐 선교사님이 아이들 상대로 예방접종을 놓을 동안 나는 뒷마당의 갈대밭을 제초하거나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뒷마당 갈대밭에 인부를 지려 놓는 데 그것을 피해서 제초하는 것이 핵심 임무였다. 일을 했다. 아이티 음식이 워낙 위생적으로 청결하지는 않아서 보통은 먹고 설사를 한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괜찮았다.
이후 토론토로 취직을 하게 되며 근처 한인 교회에 갔는데 차가 없던 나로서는 버스를 내리고서도 1.2km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서 갔다. 이땐 약간의 아이티 영향이 있기도 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을 교회에서 보내다 보니 깨달은 것은 이미 나는 나로 충분히 채워져 있는데 과연 “종교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후로는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 신앙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거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게 내 솔직한 감정이다. 두서가 장황했는데 요점은 나는 바나나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보고 모태신앙임을 주장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쓰러지고 나서 들은 말이다.
“주님이 계획하신 바가 있으실 거야.”
이 말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모를 거 같고 알고 싶지도 않다.
“기도할 게” 도 아닌 저 말은 바나나 크리스천인 나로서는 이 말은 가장 아팠던 상처로 남아있다.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고, 식습관도 평생 조절해야 하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결혼까지 연기된 내 아픔을 본인과 주님은 아는 것 마냥 배설하는 것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내가 너무 꼬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기독교에서 지향하는 가르침과 됨됨이 와도 사뭇 거리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거리 두기를 해와서 그런지 더욱 강하게 꽂힌 거 같다. 그래서 내가 더 과민 반응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 말은 들을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암 걸릴 거 같다.”
”발암이다.”
모두 인터넷 유행어로 번진 대표적인 암 드립인데 정확한 유래가 어떻게 생기게 됐는지 찾고 싶었지만 결국엔 찾지 못했다. 보통 답답하거나 짜증 나는 상황에 많이 사용된다. 2020년 기준 한국인 기대수명은 83세, 평생 암에 걸릴 확률이 38%라고 하는데 통계적으로 3명 중 1명은 확률상 한번쯤 암에 걸린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즉 우리 일상생활에서 암은 흔하디 흔한 질병이고 주변 가족, 친구들도 암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지는 못하다는 뜻이다. 이미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 두 할아버지를 각각 폐암, 췌장암으로 보나드리기도 했다. 나 또한 수술 전부터 다양한 상황에 많이 쓰던 말이기도 하고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했던 내 자신에게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수술하고 나서 귀를 닫으려 해도 여전히 자주 듣는 말이고 워낙 무덤덤한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은 좋지도 않거니와 환자마다 받아들이는 상처의 깊이도 다 다르니 조심해서 사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말과 행동으로 위장한 배설물을 짧은 3개월 동안 견뎌내야 했다. 사실 그중 친한 지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아픈 사람들은 보통 아픈 게 약점 같고 그로 인해 자존감도 낮아질 수 있어 같은 말이 어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신경 써서 말을 건네는 게 좋다. 암 환자 입장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괴리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젊음이 영원하지도 않고 젊어도 아플 수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 있어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다. 말과 행동이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고 보다 가볍지 않게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자세를 취한다면 아픈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남을 고마운 기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당신의 심심한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고 불행이 삶에 대한 의지로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