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식중독으로 두문불출할 때, 병문안 왔던 친구 아니(Annie).
엄청나게 부어오른 나의 얼굴이 안쓰러웠던지, 노르망디 지방으로 수도원 순례여행에 동행할 의향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던 그녀다.
관심을 보이면서도 약간 주저하는 나의 기색을 감지한 그녀가,
“비용걱정하지 말고, 몸만 오셔~!”
그녀가 제안대로, 노르망디지방 중세 수도원 순례 여행에 동참한 나.
박사과정 동기인 그녀는 19세기 ‘시’ 전공인 나와 달리, ‘소설’ 전공이다.
나보다 더 늦깎인 그녀는 대부분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민청 직원인 그녀는 프랑스로 이민 온 사람들과 맞대면하는 업무 특성상 프랑스인들보다는 외국인들과 더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특이한 일상이다.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종사하는 영향인지, 그녀는 비탈진 조건에서 생존하며 삼켜야 하는, 이방인의 설움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다.
소련에서 귀화한 아버지가 교사인 프랑스인 어머니 앞에서 고개 숙인 채로 침묵하던 모습이 편화처럼 또렷이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는 그녀.
그녀의 부모님은 소련과 프랑스 메뉴를 각자 요리해서 따로 먹을 때, 누구와 먹어야 할지가 큰 고민거리였다고 유년시절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민자들을 돌보는 직장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그녀.
그 누구보다도 이방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시각은 예리하면서도 따듯하다.
첫 순례지,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에 도착.
몽생미셜은 도입 도로부터 아주 특이한 풍경이다.
작은 섬 위에 세워진 몽생미셜 수도원은 장엄함과 고고함 그 자체!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지순례지로서, 잘 알려진 명성답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경건한 수도원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중세시대의 수도승들이 지층에서 식자재를 묶은 다음, 도르래를 이용하여 수도원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이 마음속에서 떠올라, 소리 없이 웃기도.
수도원 내부를 보는 데에 금방 하루가 지나갔고, 다음 행선지를 향하여 서둘러 떠나는 발목을 잡는 석양의 모습은 얼마나 황홀하던지!
황혼 빛에 잠겨가는 몽생미셜을 에워싸며 쏜살같이 달려오는 밀물은 마치 수많은 천사들 무리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붉은 황혼과 밀물이 혼연일체로 탄생되는 신비로운 바다 빛깔!
그 바다 한가운데에 드높게 서있는 몽생미셜의 고고한 자태가 천상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본 나!
밀물은 눈으로 감지되는 속도보다 실제 속도가 훨씬 빠르게 사방에서 밀려왔고, 이러한 내막을 알 리가 없었던 도보로 유럽 각지에서 오던 순례자들이 안타깝게 희생되는 사례가 예전에는 많았다고 한다.
순례자들이 물살을 피하여 안간힘으로 육지를 향하여 달려도, 순식간에 뒤따라 온 밀물에 금방 포위되고 말았던 것!
이러한 이유로 모래사장에 내려가는 것이 금지된 상태였다.
평화로운 모습의 절경이 숨기고 있던, 위험한 함정인 것이다.
몽생미셸에서 육지로 이어주는 도로는 다소 높다.
만조 때의 밀물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도로는 제방의 둑처럼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풀밭 한가운데로 뻗은 도로는, 마치 옛 여인의 숱 많은 쪽진 머리의 가르마처럼 선명하고, 도로 양쪽에는 갈색 양 떼들이 석양빛에 서서히 물들어가며,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광경!
난생처음 보는 갈색 양들이다!
아니(Annie)의 짤막한 설명,
“수시로 바닷물에 잠긴 풀을 먹어서, 갈색이래. 그래서 치즈도 좀 짜고. 전혀 소금첨가하지 않아도!”
몇 번이나 멈춰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척박한 비탈길에서 지쳐가던 이방인에게 최고의 선물을 준 죽마고우 Annie.
다음 행선지인 수도원을 향해 가는 중.
노르망디로 향하는 도로변의 건축양식들은 아주 특이했다.
프랑스가 아닌 또 다른 나라로 여행 온 것 같은 혼돈이 일어날 정도로.
낮은 지붕의 창틀에는 온갖 선영한 빛깔의 꽃들이 웃으며, 반기는 듯했다.
차창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프랑스보다 더 이국적인 바깥 풍경에 넋을 놓고 보는 동안은, 갖가지 압박감에서 모처럼 해방되었다.
중세시대 건축물인 수도원들은 대부분 한적한 숲 속에 묻힌 채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이끼로 단장한 웅장한 수도원 앞에서 저절로 경건해진 마음은, 고갈된 생존 에너지 그 밑층에서 잦아들던 청원기도까지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성서에서 술 취한 여자로 오해받은 그녀처럼, 새로운 수도원에 도착하는 곧바로 중얼중얼.
노르망디 해변에 사는 아니(Annie)의 친구.
그 집에서 하룻밤 묵었다.
수학선생인 그는 키가 1m도 채 안 되는 난쟁이였는데, 동화 속에서 나오는 마술사처럼 코가 엄청나게 컸다.
아주 입담이 좋은 그의 소확행은 아름다운 여자와 맛있게 식사한 후,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은 동양여자라고 밝히는 그의 뻔뻔스러움에서, 장애우의 위축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내 얼굴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아니(Annie),
“이 친구는 중세에서 왔어. 그만해. 학교 이야기나 해봐.”
10일간의 수도원 순례가 끝난, 마지막 날.
노르망디 끝없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나.
그 광활한 바다 앞에서 너무도 작게 느껴졌던 나, 마치 모래알갱이처럼!
카페 붙박이 가구 같은 일상을 떠나 온 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비로소 힘겨운 내적 신음소리가 들렸다.
멀리 떠나옴으로써, 나에게 귀 기울이는 여유가 생겼던 것일까?
영혼 후미진 곳곳에 억눌려있던 다양한 내면의 소리가 죽순처럼 삐죽삐죽.
참는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충동도, 밀물처럼 밀고 올라왔다.
이제는 자유롭고 싶다는 우렁찬 뇌성도!
더 이상 눈 내리깔며, 착한 척하는 미소도 중지하고 싶다는 아우성도.
사실은 아무도 나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생존하기 위하여, 스스로 기꺼이 챙겨 입었던 옷 ‘사랑스러운 딸’
이제는 답답하고 불편하며 거추장스러워진 옷!
하얀 옷에 갇힌 채로 짜증도 드러내지 못하는 회색 얼굴의 천사처럼.
내면의 목소리는 ‘유랑하는 욜랑호에서, 그만 하선하고 싶다’고 쑥덕쑥덕.
배 선창으로 추락한 뒤, 어부들에게 둘러싸여 생존했던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그 ‘천상의 새’ 만큼이나 고단했던 시기였다.
첫 순례지인 몽셀미셜 수도원부터 중세시대의 종교적 건축물로 잔존하는 유노르망디 지방의 다양한 수도원들을 순례했다.
가는 곳마다 웅장한 수도원 모습에 감탄했는데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방문했던 어떤 수도원 모습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반면, 석양에 물든 몽생미셸은 빈약한 언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고도 장엄한 광경으로 심층 깊이 새겨져 있다!
오직, 몽생미셜만 그림엽서처럼 각인!
개인적인 여행 취향은 새로운 곳을 선호하지만, 몽생미셜만은 예외다.
꼭 다시 가고 싶은 이유는 하룻밤 묵으며, 새벽 여명을 보고 싶은 소망으로!
친 자매처럼 챙겨준 Annie덕분에, 프랑스 표류기간 중에 유일무이하게 호사를 누린 노르망디 수도원 순례여행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10일 동안의 수도원 순례에서 마음속에 새겨진 몽셀미셜, 노르망디의 광활한 바다, 그리고 청원기도!
몽셀미셜 수도원을 필두로 마지막으로 방문한 수도원에서 한결같았던 청원기도는,
“주님, 제가 스튜디오로 이사 갈 수 있게 해 주시고, 욜랑은 남편과 재결합하게 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