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지방의 수도원 순례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바다로 떠났던 연어가 회귀하듯이, 욜랑네 카페로 귀가하는 중이다.
강어귀로 다시 돌아오는 연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출산의 기쁨? 아니면 죽음의 슬픔?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을지도.
순례여행에서 귀가하는 마음이 그리 평안하고, 가볍지만은 않다.
언제부턴가 카페는 생존하기 위한 전쟁터처럼 느껴졌고, 욜랑은 알바트로스가 추락했던 배의 선장처럼, 나의 생존권을 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녀가 드러내놓고 홀대했던 적이 없었는데도, 자존감이 사라진 내 영혼의 빈터에는 눈치 살피는 비루한 잡초가 무성한 요즈음이다.
아무런 말없이 운전하는 아니(Annie)에게,
“서서히 목로주점이 가까워지네.”
그 의미를 아는 우리 둘 다, 동시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카페 앞에 나를 내려주고 떠난 뒤, 욜랑에게 귀가를 알리는 포옹인사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평소 그녀답지 않은 좀 서늘한 느낌이다.
내 방까지 곧바로 뒤따라올라 온 서빙 종업인인 카트린느가,
“욜랑 남편이 합치자고 오전에 왔다 갔어. 피에르와 별거한 지 20년 만에. 기적이 일어난 거야!”
각 수도원마다 드린 10일간의 기도가 떠올라, 냅다 지른 나의 기쁨의 탄성,
“주님,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얘, 정신 차려! 마냥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니야.”
“아니, 왜요?”
“욜량과 합류 조건으로 카페를 팔라고 요구했대. 적자 액수만 계속 늘어난다고! 나는 일자리가 없어지고. 욜랑 언니 아나이스도 요양원으로 가야 할 거고.”
“그럼, 필립은요?”
필립은 욜랑의 동거남이다.
“자기 엄마 꼴레뜨 집으로 가겠지.”
“카페에 안 보이던데요?”
“충격받고는 위스키를 1병 다 마시고, 곯아떨어졌어.”
“근데, 너는 어떻게 할래?”
카페가 없어진다는 것은, 전혀 예상 못한 일이다!
아직 비상할 채비를 못했는데, 갑자기 둥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결말을 예상해 본 적은 없던 터라, 멍해진 나를 부르는 욜랑의 목소리.
카페로 내려가자마자, 어떤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오늘저녁부터, 호텔에서 지내라!”
짙은 안개 같은 불안함에 휩싸여 겁먹은 나에게, 내린 매몰찬 통보다.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추방명령을 내린 그 순간에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 오던 성탄 저녁에 할매가 매몰차게 “방 빼라!”라고 통보하던 날, “좋으신 하느님이 보내준 사랑스러운 내 딸!”을 외치며, 양팔 벌려 나를 부둥켜 얼싸안았던 욜랑이다.
4년 전의 그 할매와 똑같은 매몰찬 어조로, 오늘 퇴거 명령을 내리는 그녀.
어떤 생각이나 적절한 어떤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말뚝처럼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연했던 것은 이런 형태의 헤어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예행연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 어둠은 내 마음속에 침범한 어둠과는 비교되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어처구니 상황인데도,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고, 심지어는 하소연할 대상조차도.
‘아침 출근 때에 내 남편은, 저녁에 귀가하지 않으면 남의 남편!’이라는 속담 이 통용되는 프랑스에서,
“갑자기, 오늘저녁부터 호텔에서 지내라고요?”
큰 목소리로 예고 없는 처사라고 따지며 맞대응할 수는 없는 처지의 나.
그녀의 남편 귀가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줄 알았던 왕의 귀환 같은 기적이다!
경제적으로 침몰하는 카페에서 그녀에게 유일한 동아줄 같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출현한 날, 동일한 순간에 나도 불필요한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긴 항해 뒤에 귀항한 수리 선에 붙어있던 따개비처럼, 나를 떼어낸 그녀!
한참 후에야, 겨우 떠 오른 얼굴!
언어학 전공인 한국 유학생에게 전화를 했다.
갑자기 극심한 갈증처럼, 한국말을 하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녀에게 경상도사투리를 쏟아붓다가, 눈물과 콧물에 막혀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꺽꺽거렸다.
“마음 가라앉혀요. 내가 한번 알아볼게요. 너무 기대는 말고.”
모양 빠지게 어린애처럼 울어댄 내가 무안할 정도로 평소처럼 차분했던, 그녀로부터 1시간 뒤에 온 전화,
“다행히 스튜디오는 구했지만, 방학기간 동안만 머물 수 있어요. 그 학생이 아프리카에서 가을 학기에 돌아오기 전에 비워주어야 해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나는 연거푸 고맙다는 말을 해댔다.
다음날 오전, 임시 거처인 스튜디오로 이사했다.
그날 밤에는 참담한 서글픔이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갈대들처럼 서걱서걱.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질없고 또 위험한 태도라는 자각이 아프게 다가왔던 것이다.
뾰족한 손톱으로 가슴을 긁어대며, 자책의 생채기를 만들며 파수꾼이 된 나.
예비 전주곡도 없이 그녀가 내린 매정한 통보를 이해하는 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갑자기 내쫓겼다는 쓸개즙처럼 진한 서글픔이, 내장에서부터 올라온 쓴맛으로 영혼을 오그라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욜랑과 나, 우리들의 만남은 주변 어디서나 있는,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필요와 그녀의 너그러움이 우연처럼 마주치며 일어난 기적일까?
그녀와 나,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새벽까지 출정도로.
딱히 싫어하는 사람이라곤 없는 편이고, 누구나 너그러운 웃음으로 반긴다.
밥값 없이 카페에 죽치는 노숙자와 자연스럽게 함께 점심을 먹을 정도다.
반면에 까칠한 나는, 별도의 식탁에서 따로 먹는다.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종가인 우리 집에는 제사가 한 달에 몇 번이나 있었다.
인근의 거지들은 나보다도 우리 집 제사를 더 잘 기억했다.
골목길 초입에 일찍부터 가마니를 깔고 죽치고 앉은 채, 미리 제사를 기다리던 거지들이 싫었던 것만큼이나, 어머니도 못마땅했다.
그들이 반갑게 아는 척하는데도 아무런 대답 않고, 깡그리 무시했던 나.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집안 형편이 이미 파산지경으로 기우는 즈음에도, 중단되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가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보일만큼,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유년 시절 기억!
노숙자와 식사하는 욜랑 모습에 겹쳐 떠올랐던 우리 어매 얼굴이다.
노숙자의 대모처럼 함께 식사하던 그녀에게, 제사 때에 거지들을 챙기던 우리 어매의 옷을 덧입힌 것도 나.
하루에도 수없이 "내 딸아"라는 호칭에, 그녀의 딸로 착각했던 것도 나.
우리 어매에게는 막둥인 나의 행복이 언제나 최우선이었지만, 욜랑에게는 자신의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에서 상처받은 날이었다.
눈곱이 끼인 외눈의 곰배팔 할매와 겸상을 거부했던 유년시절의 내 모습!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남의 나라 프랑스 카페 다락방에서 퇴출당한 날, 마치 어제 일처럼 유년시절의 고약했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갑자기 입은 깊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처신 방법을 이해해야만 했다.
4년 넘게 한 지붕아래서 기거했던 인연을 충동대로 싹둑 잘라버린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몰래 삼켰던 눈물이 너무나 허망했기 때문이다.
평정심으로 생존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그녀의 입장에 서보는 힘겨운 훈련한 덕분으로 지금도 그녀에게 감사 선물과 더불어 편지를 보내고 있지만.
쉼표처럼 남아있는 그날 생긴 상처자국은 ‘누군가와 결별할 때에 더 신중해야 한다!’는 깃발은, 나의 심층 깊은 곳에서 나부끼고 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 결말은 언제나,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었지만, 살아오는 동안에 만난 어떤 만남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마냥 행복한 관계를 경험한 적은 없다.
‘진실의 저울’ 위에 동화를 올린다면, ‘허구’ 쪽 추가 최대치로 올라가리라.
동화가 어른의 심층에서 남아있던 순진한 꿈을 그린 수채화라면, 소설은 나무 위에다가 끌로 새긴 판화일지도.
달콤한 초콜릿 딸에서 따개비 이방인으로, 순식간에 신원이 바뀌는 것을 직감했던 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볼 비비며 불러대던 “내 딸(Ma fille)”대신, 갑자기 너(Tu)로 호칭하던 그녀의 목소리,
"너는 호텔에서 지내야 한다. 오늘 저녁부터!"
“Tu dois rester dans un hô̂tel. A partir de ce soir!"
아직도 우연히 호텔 앞을 지날 때에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와 연이어 떠오르는, 그날 새겨진 흑백 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