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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와 친해졌다

by 김정룡

1년을 투병하셨다

대장암이 이미

생명의 문을 닫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출혈로 응급실에 갔지만

수혈 중 급성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한동안 담배를 끊으셨지만

젊은 시절 하루 두 갑의 담배로

이미 손상된 폐포가 원인이었다

병세는 급격히 나빠졌고

대소변을 가려드려야 했다


아버지는 치매가 아닌데도

점점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작은 체구에도

공부와 운동을 다 잘하셨다

아버지만의 파이팅 넘치는 열정으로

화학공학 분야 교수가 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셨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태어나

육이오 사변을 겪으면서 죽을 뻔도 했고

부산에서 학도병으로 끌려갈 위기에

극적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가난해진 부모와

나 몰라라 하는 친척들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버지는 뛰어난 머리와 강한 체력으로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래선지

아버지의 눈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늘 파이팅이 부족해 보였다

결국은 그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간 쌓아 온 기대와 실망 탓인지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 살갑지 않았다

아들의 손에서

돌봄을 받으면서

마지막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3년 전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리고

혼자되신 아버지를 돌봐드리기 위해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주말이면 근교 드라이브,

설과 추석 때면, 아버지와 가족여행을 다녔다


그 시간 들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친해졌다

가족들도

투병하던 할아버지의 모습보다

여행길의 멋쟁이 할아버지를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58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버지에 비하면

90세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장수를 누리셨다


그래도 아쉽다


건강진단만 미리 받으셨으면

5년은 더 사실 수 있었는데

이제 수년이 지나


가족들과 나는

고인의 기억을 뒤로하고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곤 언젠가 나도

또 다른 아버지가 되고


나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기억을 남기고 갈 것이다


아버지는 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준 생명의 유산으로


또 다른 아버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중년의 남자가 되면, 대부분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게 된다. 요즈음은 기대 수명이 길어져, 이런 강제 효도가 60대, 70대까지 이어지는 일이 흔하다. 모시는 일은 힘들지만, 부모님이 건강하게 장수하셔서 감사하고, 나도 부모님을 닮아 오래 살 거라는 희망도 가진다.


대부분의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 친하지 않다. 어릴 적, 아버지는 외아들인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다. 별 대화는 없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에는 차가운 표정의 질책이나, 잘해도 긴장 풀지 말라는 훈계 정도였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머리가 좀 커지고 나니,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 시대의 아버지가 늘 그렇듯, 가까워지기 힘든 사이가 된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나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2년 넘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나는 많이 변했고, 아니 어른이 되었고,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80대에도 건강하셨고, 인생을 나름 즐겁게 사셨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주말이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안 모임의 패턴이 바뀌었다. 어머니가 없는 집안 모임은 이상했다. 그때부터, 명절 때만 되면, 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서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아버지도 가족들도 좋아했다. 특히 편찮은 어머님 때문에 집에만 계셨던 아버지는 여행을 설레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님을 모시고, 전국 방방 곳곳을 다녔다. 그러기를 3년.. 나와 가족들과 아버지는 많이 친해졌다.


그러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 그때부터 1년, 나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간호했다. 대장암이라는 병 때문에 병원이든 집이든 대소변을 봐드려야 했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와의 스킨십도 생겼다. 아버지는 힘든 중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셨다. 아버지도 아들의 손길을 많이 느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그렇게 열심히 돌볼 줄 몰랐다고 짧게 한마디 하셨다. 나는 그저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더 잘 이해했다거나, 친근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후회 없이, 인생을 선물해 준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몸 아픈 아버지가,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하시던 아버지가, 기죽지 않고, 건강하게, 극진하게 대접받으시다 하늘나라에 가시기를 원했다.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나갔다. 지난 몇 해 동안 부모님을 모두 보내드리고 나니, 나도 60대가 훌쩍 넘었다. 100세 시대가 온다면, 나는 부모 없는 세상을 꽤 오래 살 것이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 다음에는 나다. 요즈음 찍는 내 사진에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대한 전주곡으로 받아들여진다. 삶과 죽음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런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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