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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기억하는 것

비싼 돈 들여 여행하면 뭐가 남을까?

by 김정룡

1. 여행지의 기억


유혹의 근원은 여행지이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다


집 떠나 불편하고

심지어는 위험한데


멀리 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이 나아진 듯 위로받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낯선 여행지가 유혹한다


2. 몸의 기억


냄새를 맡는다


살에 와닿는

바람의 온습감을 느낀다


주변을 본다


낯섦과 익숙함을

순식간에 구분해 낸다


새로운 장소와 친해지려고


온몸의 신경이

주변의 공기와 소음과 소통한다


갑작스러운 공간이동이 만들어 낸

생경함


드디어


일상으로부터 단절되었음을

몸이 확인한다


3. 동행과의 기억


봤던 곳, 경험한 것

여정 속의 해프닝들


시간과 장소는 헷갈려도

같이 간 사람과의 기억은 선명하다


시나리오 상 여행지는 배경이고

나와 동행자가 주연이


그래서 그런지

동행과의 기억은 생생하다


같이 겪었던 황당한 사건은

평생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수없이 재생된다


4. 사진의 기억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곳의 기억은

소중하다


그 시간과 장소에서

나의 편안함, 여유, 미소가 보인다


순간을 포착하려

사진에 꼭꼭 담는다


이 기록은 흑백의 따분한 일상을

컬러풀하게 바꿔 놓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진 속에는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니라

내 뜻대로 구매한 삶이 있다


그렇게 여행을 기억한다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선지,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삶다워지려면, 여행도 좀 다녀줘야 다는 국민적 의와, 은퇴 후 여행 다니면서 삶을 즐기시라는 후배들의 덕담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과, 여행을 떠나는 순간은 나름 설레고 좋다.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지도 보랴, 이동 수단 확인하랴, 사진 찍으랴, 무언가 사색하고, 감상할 여유는 없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가는 것보다, 안전하게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더 좋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여행의 기억을 좋아하는 걸까?


즐거운 여행의 경험들이 있다. 새로운 여행지의 낯선 환경과 바이브를 느끼고, 현지인들과 나누는 눈빛과 대화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평소에 갖지 못했던 시간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도 소중하다. 그중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은 사진이다. 화려한 이국적 배경 속의 사진을 보면서, 내 인생도 나쁘지 않구나 생각한다.


아마도 인간은 새로운 장소에서 행복감을 느끼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나 보다. 심지어는 여행지에서 고생했던 일조차 즐거운 추억으로 바꾸어버리는 기억의 각색기능도 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는 자기 위로에 여행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런 묘한 여행의 심리는 대부분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처럼, 여행은 행복의 기억을 쌓게 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보상해 준다. 일상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인생이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면, 먼지 앉은 카메라 꺼내 들고, 너무 비싸지 않은 여행치료를 계획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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