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본능인가? 40년 만에 옛집을 찾았다.
가보고 싶은 집이 있다
가보고 싶은 동네가 있다
그곳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그 집은
가족들과 밥 내 나는 기억이고
그 동네는
친구들과 싸우고 놀던 기억이다
수십 년 잊고 살았던 그곳이
불현듯 그립다
혹시 집 터라도 남아 있을까?
흔적이라도 있으면
옛 장면을 추억할 텐데
그 동네 그 집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옛 동네가 그대로 있다
골목도, 집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어
여기저기 변했지만
온갖 추억 가득 찬
그 시절 그 골목이 있다
뛰놀던 아이들은 사라지고
흙 골목은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집 앞에 서있던 전봇대는
고맙게도
40년 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전봇대와 담벼락 사이를 골대삼아
땀범벅으로 축구를 했다
예전 모습 하나라도 더 찾으려
분주히 시선을 돌린다
물난리로 피신했던 동네 교회도
낡은 동네 병원 건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살던 집은
아쉽게도
없어졌다
그 자리에 카페가 들어섰다
40년이 지난 시간
낯선 소년이 집 앞에
아니, 카페 앞에 서있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되면
숙제 없는 세상을 살고 싶다던
그 소년이 나이를 먹었다
집 앞에 선 소년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조용히 카페 문을 연다
너무나 익숙한 장소
생생한 공간의 기억
대문이 있던 곳
화단이 있던 자리
강아지 집 터
소년은 커피를 주문한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찬찬히 살핀다
옛 추억의 공간
할머니가 계시던 온돌방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소년은
40년 만에
옛 집에 돌아왔다
내가 살던 곳은 지금의 성수동 카페촌이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분양하는 표준화된 국민주택들이 나란히 줄 서 있던 곳이다. 모든 집들의 크기와 평수가 똑같으니, 사는 게 다 그만 그만했고, 동네 주민들끼리는 시골 동네처럼 친했고, 아이들은 서로가 절친이었다. 그 당시 같은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을 지금도 만난다.
살던 집은 카페로 변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친구들과 축구할 때 골대로 사용했던 전봇대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서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던 흙 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렸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집 앞 모퉁이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추억의 장소이다. 거기 서있던 작은 플라타너스 나무는 없어졌다. 친구와 싸우다 그 나무 뒤에 숨어 서로 돌팔매질을 했다. 그때 돌에 맞아 흉터진 왼쪽 눈썹은 지금도 나지 않는다.
집 앞 골목에서는, 겨울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눈사람 만들고, 굴린 눈덩어리로 요새를 만들어 단체로 눈싸움을 했다. 이 골목에 놀던 게임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망까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공기놀이, 다방구, 범들기 (구슬을 구멍에 넣는 게임), 홀짝, 이찌 니 산 (셋 중 하나를 맞혀 구슬 따먹는 게임인데 일본말을 썼다), 쥐불놀이, 술래잡기, 땅따먹기, 말타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줄넘기, 고무줄놀이 (남자애들이 할 수 있는 게임도 있었다), 사거리놀이 (십자 가이센이라는 일본말을 썼다). 그리고 골목 코너에는 달고나 아저씨가 늘 계셨고 (그때는 뽑기라고 불렀다), 저녁 때는 동네 강아지들이 다 나와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카페촌 가까이 있는 지금의 "서울의 숲"자리는 경마장 터였다. 주말만 되면 경마꾼들이 몰려들어 동네가 어수선했다. 나는 경마장 안에 몰래 들어가 사택에 살고 있던 친구와 같이 말이 뛰던 트랙을 같이 뛰곤 했다. 주말이면 경마로 한몫 잡은 사람은 술파티를 즐겼고, 대부분은 돈을 잃고 술을 마셨다. 주변 환경이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동네 지면은 한강의 지천인 중랑천보다 바닥면이 낮았다. 비만 많이 오면 침수를 걱정했다. 실제로 나는 집이 잠기는 것을 3번이나 경험했다. 물에 잠긴 집에 도둑이 들까 봐, 힘 좋으신 고모부가 지붕에서 물에 잠긴 집을 지키곤 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먹을 음식을 머리에 이고, 흙탕물을 헤치며 식사 배달을 했다. 그러다 물이 깊어 발이 닿지 않으면, 이고 있던 음식 비닐 주머니를 놓쳤고, 음식을 건지러 더러운 물에서 수영을 해야 했다.
그런 사정으로, 주민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떠났다. 2번째 물난리를 겪고 나서, 부모님도 고민하셨다. 결론은 침수가 돼도 피난 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2층집을 짓기로 했다. 그 덕에 나는 그 집에서 3번째 물난리를 겪으면서 8년 정도를 더 살았다.
그런 추억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그곳이 고향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이제 집은 없어졌지만, 카페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제라도 고향이 그리우면, 와서 커피 한잔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고향 집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