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끼의 식사의 의미
경박스런 전화벨이 울린다.
“뭐하니?”
“애들 하고 있지. 아침에 무슨일이야?”
사람의 수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당돌한 코로나가 확산되자 주변 엄마의 불편한 전화를 받는다. 학교도 학원도 못가니 이참에 홈스쿨을 문의하는 전화가 대부분을 이룬다.
학교 진도는 EBS나 온라인 학습으로 통과.
학원은 줌이나 여러 화상매체로 통과.
오히려 학교나 학원 오가는 시간 세이브되니 더 낫겠다는 무한 긍정으로 혼자서 재빠른 결론을 내린다.
이제 내가 변론할 차례다.
“밥은?”
대답이 없다.
“삼식이에 일주일이면 21끼야.”
당장 내일이라도 시작할 듯 스케줄을 세우더니 대뜸 바라지도 않은 경의를 표한다.
3분의 통화로 시원하게 코로나의 빠른 종식을 바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한다.
짧은 전화 통화가 오후까지 생각이 머문다.
밥, 식사, 끼니는 뭘까.
식사는 따뜻함이다.
식사 준비에 먹을 사람을 생각한다.
들은 말에 서운함이 뱃속까지 내려 가진 않았는지.
남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에 추움은 없는지.
알지 못하는 마음의 응어리가 따뜻한 식사로 녹아지길 바라는 따뜻함이다.
식사는 응원이다.
살다보면 살 떨리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이라고 없으랴.
혼자서 없는 수학머리로 수학이라는 녀석과 1:1 승부를 내야한다.
혼자서 내 나라 말도 아닌 녀석과 결투를 벌여야 한다.
때로는 싫은 반찬을 살짝 피해 먹는 식사의 지혜를 호기롭게 부려보길 응원한다.
때로는 한가득 베어 물은 총각무를 씹듯 공격적으로 박살내길 응원한다.
식사는 관계다.
식사 시간의 대화는 보약보다 귀하다.
입에 맞는 반찬을 물고 있노라면 성급함없이 서로의 말이 들리고 공감이 된다.
그 말이 음식과 함께 속에서 소화되어 필요한 영양소처럼 필요한 곳에서 꺼내지길 바란다.
사람이 보이는 관계로 거듭나길 바란다.
식사는 추억이다.
식사 시간에 엄마의 라떼 보따리 푼다.
듣는 아이들에게는 구석기시대 이야기라고 웃는다.
전하는 나에겐 그 시절 엄마가 보고 싶다.
식사는 정리다.
식사를 한다는 건 정리가 포함되어 있다.
살다보면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붙잡아야 할 부분과 놓아야 할 부분을 잘 정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식사는 날것이다.
밥그릇에 담겨진 밥의 모양만 보아도 안다.
가지런히 썰린 김치만 보더라도 마음 상태가 보인다.
오늘도 날것의 마음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 추스르려고 애쓴다.
식사는 불편이다.
공유하는 시간이 많은 우리라고 항상 좋을 수는 없다.
마주 앉기 불편한 날들도 있다.
마주 앉아 같은 반찬에 젓가락 대기 싫은 불편함이 있다.
홈스쿨에서 식사는 21끼의 일주일 식사횟수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21끼 식사의 의미가 삶에 어려움이 밀어닥칠 때 훌훌 털어 내는 자양강장제가 되기를 이 모든 의미보다 더 강하게 새긴다.
오늘도 불편한 밥스쿨은 여러의미를 찾으며 여전히 순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