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나는 나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언젠가는 맺어야 할 열매의 맛이 보장되지 않았다. 작고 쭈글쭈글한 열매를 탐스러운 다른 열매들 사이에 내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만인 앞에서 그 부끄러움을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아무 열매를 내지 않는 게 나은 선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나중에 가서 보니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았다. 그는 포도 재배인에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으니 열매 맺지 않은 그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 명한다.
그러자 포도 재배인은 대답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 6-9 참조)
오늘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어떤 길에서 방향을 다시 돌려야 할까, 나의 회개는 무엇이어야 할까 고민하다 문득 제1독서의 떨기나무 장면이 떠올랐다 (탈출 3,1-8ㄱㄷ. 13-15 참조).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는 않는 희한한 광경에 모세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더 이상 가가이 오지 말라며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나는 있는 나다."
주님의 본질, 있는 나,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 있으신 분. 거룩한 그 땅을 밟을 순 없으니 나는 그분의 완전한 본질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마주한다. 마치 내가 타인의 존재 안에 완전히 들어갈 순 없지만 끝없이 그와 소통하여 그를 알고 내 존재 안에 품어가듯이, 당신을 사랑하나 완전히 당신이 될 수는 없는 신비의 역설 앞에 신발을 벗는다. 신을 벗고, 존재하는 당신의 본질 앞에 나 역시 있는 나로서 똑바로 선다. 내 안에 주님의 음성이 울린다.
"너의 본질은 무엇이냐?"
"너는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느냐?"
회개의 길에서 사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작은 변화가 너무 어렵다. 내가 맺을 열매가 보잘것없을 게 뻔한데, 어찌 이 부끄러움을 꺾고 모든 걸 다 터트려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포도밭에 심긴 유일한 무화과나무. 그러니 나의 열매는 달라야 한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포도밭에 심겼다 하여 무화과나무가 포도를 내놓을 순 없는 일 아닌가. 누가 뭐라 하든 그냥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더 작고, 덜 달다 비교할 일이 없다. 애초에 나는 다른 몫을 안고 심겼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 위로 쏟아지는 햇살도, 빗방울도 마음껏 삼키지 못했다. 이제 자애로운 포도재배인은 거름을 부어주며 나를 보살핀다. 나를 토닥이며 손과 발을 쭉 뻗어 다 받아 누리라 한다.
"내가 너를 귀하게 대하니, 너도 너를 귀하게 대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나의 본질은 아름답게 살아있음이다. 이 아름다움에 걸맞은 대접을 스스로에게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생명이 열매를 통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없어도 내 손과 발끝에 닿는, 영양분 가득한 거름의 힘을 믿어야 한다. 한치의 남김도 없이 그 힘을 다 빨아들이리라. 나를 둘러싼 충분하고 충분한 사랑과 지지에 뿌리를 내린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에서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회개의 열매가 자라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