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 반갑지 않은 이유
내 일생에 단 한 번, 새 교황님 선출을 가까이서 목격할 기회가 생겼다. 시스티나 경당 위에 설치된 연통으로 흰 연기가 나오고 약 한 시간 정도 후에 교황님의 첫인사가 있다고 하니, 학교에서 일을 마치고 달려가면 되겠다 싶었다. 참고로 나는 꽤 빨리 걷는 편이다. 새 교황님의 첫 강복을 현장에서 받을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은 벌써 저 멀리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7일 어제 오후, 나는 침대에 누웠다. 왜 하필 이때 나의 편도선은 붓기 시작한 걸까. 하루 저녁 잘 쉬면 나을 수도 있어서 어떻게든 계속 개인 일정을 진행하고 싶었다. 취소하기엔 미안한 약속들도 있었고, 또 무엇보다 새 교황님을 뵈러 성 베드로 광장까지 달려가야 했기에 편도선의 이상이 그저 엄살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 엄살조차도 받아들여야 할 나의 현실이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온전히 성령의 인도에 맡기고 마음을 모으기 시작한 추기경님들을 위해 이 작은 희생을 봉헌하기로 한다.
나 역시 방문을 잠그고 성령께 내 몸을 맡긴다. 반갑지 않은 휴식은 이렇게 나의 작은 희생이 된다. 아직 목소리는 멀쩡한데 사실 계속 통증이 있어서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소셜 시대에 치러지는 첫 콘클라베라며 떠들썩한 때에, 다시 침묵을 배우는 때다. 어떤 성향의 교황이 선출될지 너무 말이 많다. 이태리어로 Papabile라는 표현이 있는데, Papa + Abile 교황이 되기 가능하다는 뜻으로 세간에서 생각하는 교황 유력 후보자들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 어마어마한 돈이 교황 선출을 둔 내기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읽고 참 씁쓸했다. 인간적인 호기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쏟아낼 때가 아니다. 새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분의 지상 대리인이자 종들의 종이 되어 하느님 백성을 섬길 것이다. 함께 침묵하며 성령께 귀 기울일 때다.
로마에 살아도 교황님은 사실 저 멀리 계신 분이다. 그래도 우연한 기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편지 써서 답장도 받고 악수도 해봤지만 나는 그저 무수한 군중의 하나였다. 너무 긴장이 돼서 말은 한마디도 못 했고 눈도 제대로 못 쳐다봤다. 하지만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한 나의 진심은 언제나 내 숨은 정원 한켠에 피어난 꽃이었다. 다시 나는 그 숨은 정원에 새로운 꽃을 심는다. 새 교황님을 맞이하는 현장에서 환호의 마음 드러낼 길 전혀 없지만 나는 조용히 독방에서 손을 모은다.
솔직히 이렇게 지향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여 골칫덩어리 편도선의 엄살에 대한 속상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왜 하필 이때야!" 소리쳐 혼쭐을 내주고 싶다. 그치만 아픈 데에는 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아프려니까 아픈 거다. 그 작은 편도선이 나를 지키고자 얼마나 힘껏 싸워왔겠나. 그런데 이렇게 백기를 들 때는 도저히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 (이러다 혼나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온전해야 하느님 백성이 온전한 거다. 그 거룩한 콘클라베에 감히 비할 수 없는 나의 이 시간에 살며시 소중한 의미를 담는다. 이 하찮은 고통이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였으면 좋겠다. 꿈을 꾸는 건 자유다.
다시 꿈을 꾸러 침대에 누워야지. 언젠가는 낫는 꿈.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덜 아픈 나의 꿈. 아픈 이를 감싸주는 교회의 꿈. 죽음이 아닌 생명의 빵으로 모두를 살리는 주님의 꿈. 그 꿈이 다 이루어지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