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바람

내게도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by 어엿봄

오늘 하루는 정말 제대로 공쳐버린 하루였다. 답답했던 마음을 이래저래 하지 못하고 그냥 가벼운 드라마나 보면서 날려 버렸다. 화가 나면 잊어버리고 치워 두는 게 편해서 그렇다. 자기 전엔 하루를 늘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제야 다시 올라오는 감정들이 있다. 변하지 않은 그대로 있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1. 산에 가서 푸르름에 나를 물들이고 싶다.

2. 홀로 밤길을 걸으며 음악을 듣고 싶다.

3. 울림이 좋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

4. 도서관 어문학실에서 마음껏 책을 골라 읽고 싶다.

5. 최고 심박수가 나올 때까지 달리고 싶다.

6. 향긋한 봄나물을 먹고 싶다.

7. 라일락 향기를 맡고 싶다.

8. 온몸의 근육이 땅길 때까지 웃고 싶다.

9. 눈치 보지 않고 소리 내 울고 싶다.

10.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그 시간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다. 늘 나는 행복하고 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는 게 지겨웠다. 그냥 가슴이 많이 답답했는데 말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어떤 시간 속에서 어떤 감정들을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늘 그렇듯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지금의 나를 회고하고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가족보다 더 가깝고 편한 존재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엄마에게는 투정 부리지 못할지언정, 그래도 여기저기 아프고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관계에는 나의 신앙과 신뢰가 전제되었다. 의무감으로 묶여 있는 관계라고 하기엔 너무 비인간적인 것 같아 나는 나의 애정과 존중을 쏟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은 그런 나의 노력까지도 자꾸 부질없게 느껴진다. 인간적인 신뢰감이 깨졌다. 그걸 붙들어줄 나의 신앙이 충분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또다시 갇혀버릴 나에게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최대한의 친절과 사랑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사실은 나 스스로에게서 따뜻함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와 친절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내게 미소를 건네지만 썩 친절한 편은 아니다. 나는 내 욕구에 관대하지만 관대했던 나에 대해 책임을 크게 묻는다. 나는 나에게 차가운 사람이 맞다.


인생의 모든 단계에는 그에 걸맞은 자존감이란 게 있다. 어쩌면 지금은 나의 자존감을 새롭게 쌓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차가움이 나를 미워할 이유가 되지도 나의 실수가 나를 나무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실수와 차가움도 내 맑은 마음 물들일 한 점의 잉크 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차가운 파도로부터 아무도 나를 지켜줄 수 없었던 그날의 어린 나를 다시 지켜주는 것이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없으니 주저앉아 몸을 웅크린다.


나를 지키려는 소소한 바람을 주님께서 들으시리라. 그렇게 거센 파도 일으키는 바람을 꾸짖으러 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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