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과 신장 하나

두 개의 행복

by 감자돌이

포스트잇 한 장을 그녀의 책상 위에


"9시 30분에 운동장 중간에서 보자"

결국 고백을 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저녁 6시에 난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하 a)의 룸메이트에게 조그마한 포스트잇을 한 장 건네면서 말을 전했다.

"이거 조심히 xx이 기숙사 책상 위에 붙여놓아 줄 수 있어?"

돌아오는 답변은 엄청난 호들갑이었다. "드디어 하는 거야?" "와 우리 반 1호 커플 탄생이야?" 다들 해맑았다. 해맑았다고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쯤, 내가 해맑은 게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언제부터 해맑음을 모르고 살았을까 그러면서 그 밝음과 웃음이 부러워졌다. 더욱더 갖고 싶었고, 이 부러움은 곧장 더 고백할 용기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난 말했다. "고백할 거야"

늘 그렇듯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이날은 유독 좋아하던 게임을 하러 pc방을 가지 않고 나름(?) 멋져 보이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남자로 기억이 되었으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기숙사에서 차분히 공부를 하였다.

4월 모의고사가 코앞이기도 하였고, 내신도 챙겨야 했기에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였지만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펴놓고 있긴 했지만 왜 이렇게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지 공부에 집중이 안되고 온통 9시 30분과 그녀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마치 전국체전이나, 영재원 시험, 혹은 나쁜 짓을 해서 걸리기 전, 혹은 입학시험 급보다 더 더 더 중압감과 긴장감이 날 짓눌렀다. 그만큼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가 싶었다. 1초가, 1분이, 1시간이 지나면서 시침이 숫자 9를 가리키는 시간이 가까워져 갔다.

지금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때 기숙사의 쉬는 시간은 9시 30분부터 10시까지였다. 무려 30분이었기에 많은 기숙사에 사는 선후배들이 운동장을 돌거나, 근처 마트에 가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샤워 등을 하는 각자 하고 싶은 걸 하였다.


스포트라이트는 과한 거 아닌가요?


9시가 되자 난 조용히 자습실을 빠져나가서 4층을 가서 옷을 갈아입고, 혹시나 안 좋은 냄새가 날까 칙칙칙 좋은 향기를 뿌리고 나름 꾸몄다고 생각한 후, 9시 30분에 맞춰서 운동장으로 나갔다. 기숙사를 나와 학교를 지나 운동장 중간까지 가면서 얼굴은 점차 붉어졌고 심장이 콩닥콩닥 되기 시작했으며 쌀쌀했던 밤이었지만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까지 소문이 퍼졌길래 이렇게 운동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물론 나의 친구들도 다 큰소리로 떠들면서 "xx이 운동장에서 고백한대" 이러면서 선후배들을 모으고 있었다. 조용히 고백하려 했는데 어쩌다가 기숙사 전체가 집중할 만한 사건이 되어버렸는지 참.

눈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저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단번에 그녀임을 알아차렸다. 뽀얀 피부, 이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긴 생머리, 항상 좋아하고 즐겨 입던 티셔츠를 입고 반바지를 입고 귀염뽀짝한 신발을 신고 나왔다. 하필 운동장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이유는 뭘까? 나름 특별한 기분도 들고 우리의 첫 탄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 기쁘긴 하였다.

난 반대쪽 골대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불빛을 따라서 그녀가 나한테 다가옴을 유심히 쳐다밨다. 마치 결혼식 때 신부가 입장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운동장에 있던 모두가 운동 혹은 하던 일을 다 멈추고 계단이나 근처 벤치에 다 앉아서 우리 2명에게 집중을 하였다.

한 발짝, 두 발짝, 나한테 가까워졌다. 내가 오히려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서 고백을 하고 싶었지만 꾹 기다렸다. 이 순간 진짜 길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안 그래도 늦게 뛰는 심장이 더 시간을 느리게 보내고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앞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 포스트잇 잘 봤어, 왜 불렀어?" 상당히 산뜻하고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 질문은 어쩌면 답정너(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는 말) 일수도 있다고 생각이 된다. 이미 솔직히 다 알고 왔을 거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행복이 과할 정도록 행복하였기에 감정을 최대한 살려서 말을 꺼냈다.

"어.....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특유의 말 더듬는 것과, 질문을 하기보다는 의사를 확실히 비치는 문장. 바보 같아 보이면서도 강단 있는 강한 문장. 완벽했다. 이미 저질러진 물이었고 나의 심장은 그녀의 답을 들을 때까지 호흡을 멈춘 채 폭주하기 시작했다. 운동장의 스포트라이트는 2명을 비추고 있었고, 이걸 보고 있는 모든 학생관람객들도 숨을 죽이고 시작했다.

1초... 2초.... 3초 몇 초가 지나지도 않아서 그녀는 답을 꺼냈다.

"그래 좋아!" 해맑았다. 기뻤다.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었다. 1일 시작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곤 합니다.


한두 말밖에 대화를 나누어보진 못했지만 금세 빨개진 두 명의 남녀, 그리고 한쌍의 커플. 정말 순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 다 이성을 잘 대할 줄 몰랐고 각자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어수룩할 정도였으니. 둘 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만 컸지 그 마음 그대로 서로를 대해주면 되었는데 부끄러움에 수줍음에 뭔가를 막 해보진 못했다.

난 그녀의 입에서, 아니지 이제 여자친구의 입에서 좋아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대로 기숙사까지 쭉 달려갔다. 유독 숨이 찬 줄도 몰랐다.

기숙사에 들어와서 옩갖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질타를 맞았다.

"아니 고백했으면 11시나 12시까지 더 데이트하고 오지, 뭐 하러 혼자 사귄 지 1분도 안되어서 여자친구 혼자 덩그러니 놔두고 혼자 부끄럽닥도 뛰어오냐?"

맞는 말이었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여자친구의 얼굴을 못 볼까 봐 실수를 해서가 아닌 너무나도 좋아서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아서 부끄러움이었다.

난 기숙사에 들어와서 밤새도록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대화를 많이 해보진 않아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여자친구가 좋았다. 정말 이 여자와 함께 쭉 사귀어서 결혼하기를 희망하는 꿈을 꾸며 새벽에 잠들었다.

다음날 학교는 시끄러웠다, 입학할 때부터 이뻤던 여자아이와 완벽함에 가까운 남자아이의 커플의 축하를 선생님들도 축하해 주시고 선배님들도 축하해 주셨다. 너무나도 감사했고 난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을 하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사람일까요?


행복한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급 커브길에 들어오듯 중요한 동시간대에 벌어졌던 이야기를 하나 적어볼까 합니다. 한때 엄청나게 미워했던 그리고 결국엔 존경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리워하기까지 한 그와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낼까 합니다.

여자친구와 고백을 고1 4월 모의고사 전에 했더라면 아마도 시점은 몇 주 전인 4월 초가 될 것입니다. 4월 초에 3월 모의고사 통지표가 나왔었는데, 4등급, 5등급이 나왔었습니다. 등급에 대해 잘 몰랐지만 1등급부터 9 등급까지 있었고 4,5등급이면 중간정도 하지만 원하는 대학교를 골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한 성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로 전화가 한통이 걸려왔었다. 어머니셨다. 전화가 없는 거의 유일하게 학교에서 나만 폰이 없었기에 학교로 전화가 오신 거였다.

"아버지가 아프시니 xx대학교로 오렴" , 추석 때 잠깐 오고 6개월 만에 연락 와서는 저 말이 전부였다. 무슨 상황일까? 이게 맞는 걸까? 정말 저번에 말씀하셨던 b형 간염이 크게 되어서 편찮으시건가?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아버지를 보러 갔다. 친가, 외가 진짜 살면서 한번 볼까 말까 했던 분들도 많이 와 계셨다. 난 그를 보러 갔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혐오와 불쾌감만이 찌들어 있었다. 내가 걸어가니 다 길을 비켜주었다. 날씨가 좋았다. 1인실, 깨져있는 방의 유리창, 아버지가 부신 것이었다. 어지럽혀져 있는 병실, 그리고 그걸 급하게 치우시는 친척들과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통제력이 강하신 그가 심지어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길 싫어하시는 그가 뭐 때문에 이렇게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나와 그는 거의 2년 만에 대화를 처음 했다. 어색했다. 둘 다 이해관계가 충분히 성립되지 않았고 어색하였지만 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다 아들"

그에게 아버지라고 난 말을 하지 못했다. 날 버렸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뱉기보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는데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더라, 나중에 술 한 잔 같이 해야 할 거 아이가. 그래서 부탁이 있다."

난 사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린 걸 알고 있었고, 시한부를 선언받은 거를 알고 있었다. 부탁?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아버지가 거의 빌듯이 부탁을 하셨다. "너의 신장을 하나만 나한테 기증해 줄 수 있겠니? 의사가 신장을 바꾸면 살 수 있다고 해서 그냥 물어보는 거야, 안되면 안 된다고 해도 좋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본인이 시한부인걸 모르고 계시는 걸까? 의사들은 환자의 정신을 위해서 말을 안 해도 되는 걸까? 사실을 숨겨도 되는 걸까? 이 모든 문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내가 모든 걸 빌면서 달에게 빌었던 것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난 흔쾌히 준다고 했다. 애써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당연하지, 나랑 혈액형도 같고 어차피 2개라서 한 개 정도는 괘안타아이가". 진짜 공식적으로 올라가는 글이기에 욕을 쓸 줄 없지만 진짜 엄청나게 슬펐다. 특히 의사가 가장 혐오스러웠다. 왜 알량한 희망을 주는 걸까? 내가 의사가 되면 난 저러지 않기로 수백 번 다짐을 하였다..

내가 준다는 말을 그에게 하자마자 그는 내 나이 17살 살면서 처음으로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그 희망이 그에게 저렇게 큰 "행복"을 가져다준 것인가.

난 이때 "행복"이 뭔지 정확하게 배우게 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정체.

가끔 길을 지나가다 보면 갓 태어난 아기들이 엄청나게 밝고 행복하게 웃음을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귀여운 생명체들은 정말 단순하게 그 행위 그 사실에 의의를 가지고 웃는 것인데 그가 딱 그랬다.

살 수 있다는 행복.

정말 그는 행복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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