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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사람다워졌다

터닝포인트는 존재한다

by 감자돌이

터닝포인트는 존재할까


노을이 지자, 하늘 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매번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이런 풍경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몰려왔고, 배꼽시계가 울리는 걸 보니 대략 저녁 7시쯤 되었던 것 같다.


우린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터닝포인트란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


마냥 걷다 보니 외딴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하나 없는 조용한 동네, 몇 분의 어르신들이 집 불빛에만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근처에 다가가자 강아지들이 짖어대더니, 한 할머니께서 어디선가 툭 나오시며 “이 시간에 웬 총각들이 여기 있냐”라고 물으셨다.


목도 마르고 지쳐 있었지만, 예의는 차리며 조심스럽게 물을 요청드렸고, 이곳의 지리와 연락 가능한 방법도 여쭤보았다. 단비처럼 내어주신 보리차 한 잔은, 그 순간 우리에겐 작은 행복이었다.


대략적인 길 안내를 들은 후, 우리는 “여기가 터닝포인트일지도 모른다”라고 사실 여부 관계없이 우리들끼리 합리화하며 방향을 틀었다. 마을 어귀에서 90도 꺾어 나가면 도로가 나온다는 말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버스도 끊겼을 시간, 마침내 도로에 도착했다. 그제야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

‘아, 우리가 여길 이렇게 지나쳐 왔구나.’


돈이 없었지만 택시를 타기로 했다. 돈은 기숙사에 있으니깐...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 교실 칠판엔 "종례시간에 없어서 결석 처리함"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마음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하며 가방을 챙겨 기숙사로 향했고, 우리는 말없이 웃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전자기기 없이 11시간을 걷고 뛰었던 우리에겐, 서로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났다.


우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걸까. 함께 출발했다가 중간에 돌아갔던 친구들도 샤워실로 모였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포기했고, 누군가는 어둠이 무서워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한 우리에겐, 이런 별명이 붙었다.


순화해서 말하자면


“정신 나간 놈들.”


끈기 하나는 미쳤었다.

이게 아마 자기의 색깔과 자기의 목표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 같다. 포기를 모르는 우리였다.


샤워를 마친 후 컵라면을 먹으며 네이버 지도를 켰다. 길이 아니기에 거리뷰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동네 위치며 강물, 논밭을 보니 우리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걱정도 불안도 없는 깊은 잠을 잤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날 밤, 우리는 모두 코를 골며 잠들었다.


담임선생님께 괜스레 고마웠다. 다음 날, 우리는 결석 처리 가지고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정시로 대학을 갈 생각이었으니까. 출결 따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물론 아주 나중에, 선생님께서 결석 처리를 슬쩍 취소해 주시긴 했다.

그 대신, 매주 수요일마다 우리는 달리기를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고 인성교육은 쭉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선생님이 고문시킨다고 저게 무슨 선생이냐며 나가버린, 결국 몇몇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와 끝까지 남은 친구들은 재밌으면 뭐든 했고, 뭐든지 해놓으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스승님에게 반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진 제자들을 버릴 스승님도 아니었다.

결국, 3개월 지났을 때 나는 스승님을 제치고 5시간 달리기를 마친 뒤 교실로 들어왔다. 이겼다. 정말로. 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우리 모두에게 고기를 사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시절에만 존재하는 묘한 충만감 같은 것.

그러시면서 피시방은 마음대로 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4,5개월 간 느낀 점이 많을 거라고, 이제 우리에게 맡긴다고 하셨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께서 스승님께 내 과거를 말하시며 날 부탁하셨다고 한다.


한 번쯤 나도 꾸며볼까.


어느 날, 거울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키가 컸다. 육체도, 정신도 함께 랐다.


입학할 땐 키가 160cm였는데, 어느새 181cm가 되었다.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막상 커 보니, 좋았다. 중학생 때는 마음껏 먹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 땐 닥치는 대로 먹었다. 먹는 족족 에너지가 되어 몸에 쌓여갔다. 그게 그대로 키에 반영되었다.

그 순간,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성장한 아들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도 이제는 정말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보내드려야 하지 않을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나는 외모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헤어스타일도, 패션도, 화장도, 요즘 유행하는 것들도 전부. 관심이었다.

머리에 열이 많았고, 운동부 시절을 하며 매번 빡빡이었다. 지금 까지 머리를 기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매번 빡빡이 혹은 밤송이머리에 후드티나 단 색 면티, 그리고 부드러운 반바지에 모자 이게 날 대표하는 룩이었다.


꾸밈없는 나였다.

사실 꾸밀 줄 모르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러다 문득 미기로 다짐을 먹었다. 이유 없이 외적을 가꾸기로 다짐했다.

무작정 친구들과 여자애들한테 물었다.


나 좀 꾸며줄래? 뭐 그런 거 있잖아.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나 얼굴에 바르는 기본적인 것들 입술에도 바르고 옷도 나한테 어울리는 후드티나 모자 그런 거 말고... 흔히들 말하는 남자 친구룩? 있잖아.


그럴 때면 친구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냐고 물어봤었다. 난 매번 웃으며 이제 사람답게 살려고라고 말했지만,


짜 속마음은 중에 신이 되어 어머니 보러 갈 건데 그때 멋있게 가고 싶다였다.


그렇게 꾸밈을 배웠다. 다운펌, 매직, 틴트, 로션, 스킨, 그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점은 이때를 기점으로 비누와 빨랫비누를 안 쓴다는 것이다. 그전까진 오이비누 살구비누 1개로 샤워할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었다. 옷도 빨랫비누로 대충. 하지만 바뀌게 되었다.


겉이 바뀌다 보면 언젠가 마음속 깊은 곳도 바뀌지 않을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사람다움이 뭔지 깨닫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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