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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마마 Aug 01. 2024

원격지원중

원격지원중

그저께 친정 아빠가 증권 프로그램 로그인이 안 된다고 잠깐 와서 봐달라고 했다.

서귀포에서 제주시를 잠깐이라 하시다니 너무해.

외부에서 오전 내내 업무 중이고

잠깐 갔다 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들어가서 휴가 신청을 하고 나와야 했다.

그 사이 아빠는 증권회사 직원에게 연락했다.

오후에 증권회사 직원이 방문해서 한 시간가량 봐줬다.

프로그램 삭제를 하고 시간이 없다며 프로그램 설치는 다음날 오후에 해준다고 했다. 의아했다.

아빠는 다음날 오전에 잠깐 와주면 안 되냐고 한다.

컴퓨터 이상이 아닌지 말하니 컴퓨터를 바꿀 정도면 다 정리하겠다고 한다.

다음날 오후에 증권회사 직원이 또 오기로 했으니 그 결과를 보면서 가겠노라 했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다.

어제 오후 증권회사 직원은 에러가 나서 안 되고 있으며 원격지원을 받아보라 하곤 갔다.


오늘 아빠를 드디어 찾아뵈었다.

젊은 전문가가 해도 안 되는 것을 내가 무슨 수로 하겠냐며 그러나 안 간다고도 못하고 툴툴거리며 갔다.

네이버 창이 슬로모션으로 나왔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틀이나 다녀 간 증권회사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고객센터번호를 일러주었고 에러코드 캡처한 것까지 고객님의 핸드폰 문자로 보내주었다.

오전 내내 공인인증서 로그인만 무한 반복했다.

고객센터 전화하니 한 번은 되었다.

다시 무한반복.

아빠는 하루 두 끼만 드신다며 점심도 먹지 않았다.

배고프냐며 과자를 먹겠냐고 물으신다.

오란씨 파인 맛 한 잔과 오 고생이 생강과자 세 조각을 먹었다.

아빠가 이런 과자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하니 어린 시절 먹고 싶어도 못 먹었다며 과자가 어디 있었냐며 그래서 먹는다고 했다.

오전 반차만 내고 온 건데 두 시 전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휴가를 좀 더 쓰기로 했다.

오후가 되어 원격지원을 시도했다.

컴퓨터를 껐다 켜는 사이 너무 느려서 원격지원이 끊겼다. 원격지원을 다시 시도했다.

느려도 정말 느렸다.

아빠는 느려도 되기만 하면 된다며 기대에 부풀어선 한껏 신이 나 보였다. 나는 그런 아빠한테 컴퓨터 A/S부터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며 짜증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걸 스피커폰으로 듣고 있던 직원이 말린다.

“고객님~~ 지금 컴퓨터가 켜지는 데만도 10분이 넘게 걸리고 있어요. 이 컴퓨터는 사양이 너무 낮아서 A/S로 될게 아니에요. 50만 원만 주면 노트북도 살 수 있고, 70만 원 정도면 컴퓨터도 살 수 있어요. 제가 어르신들 이런 컴퓨터 많이 보긴 봤는데요 그중에서도 제일 느려요. “

어찌어찌 원격지원이 끝났고 아빠는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일 동안 얼마나 답답했으면 딸이 가는 것도 내다보지도 않고 컴퓨터만 들여다보신다.

어찌나 서운하고 화가 나던지 전화 오면 안 받으리라 마음먹었다.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


아빠는 두 차례 전화를 하신다.

처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까지 갔는지 물으셨다.

둘째 데리러 간다고 했다.

둘째와 친구들이 배구를 마치고 나온 터라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사 왔다.

엄마 점심 못 먹었으니 아무거나 사 오라 했더니 주황색 환타를 두 개 사 왔다. 내 취향을 존중받은 거 같아 흡족했다. 게다가 둘째도 같은 주황색 환타라니.

파인맛 오란씨를 먹은 뒤지만 맛있었고 기분이 좋아졌다.

두 번째는 도착은 잘했는지 점심도 안 먹고 고생했다며 미안하다 하셨다. 핸드폰을 노려보던 눈이 풀리면서 나왔던 주둥이도 조금 들어갔다. 마음이 조금 풀렸나 보다.

아빠한테 컴퓨터는 잘 되고 있는지 물었고 둘째 배구 끝나는 시간이랑 딱 맞았다고 하곤 더 짜증을 내진 않았다.

컴퓨터를 바꿔야 한다는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원격지원 직원의 어딘가 나릇 한 목소리.

어르신들의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많이 응대해 본 차분하고도 친절하고도 연륜이 느껴지는 어조는 기다리고 기다리는 기다림의 끝판왕 같았다.


아빠는 밤 10시가 다 되어 다시 한번 전화를 하셨다.

아까 고객센터 직원이 뭐라고 했냐고.

업데이트랑 포맷이 다른 거냐고.

증권회사 직원이며 원격지원 직원이 느린 컴퓨터 때문에 고생 많았고 그럼에도 끝까지 친절했다고 하니 뭐가 친절했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신다.

요즘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며 울음이 터질 것 같다고 하신다.

승부욕에 불타는 아이처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돼서 우는 아이처럼.

울지 마시라고 컴퓨터를 사드리진 못 해도 주말에 같이 컴퓨터 사러 가 드리겠노라 했다.

진정이 좀 되셨는지 고맙다고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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