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전날밤 나는 다림질 따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알람이 터졌다. 정말 첫날부터 늦고 싶지 않았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갔다. 뜨거운 샤워의 스팀에도 구겨진 와이셔츠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늘은 자켓 벗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 달의 연수 교육이 실시되는 장소는 마블 아치역 (Marble Arch) 바로 위에 세워진 The Cumberland 호텔이다. 정문 길 건너 맥도널드가 있었고 도보 10분 거리에 중국과 중동의 유수 탄광, 유정 (油井) 신흥부호 자녀들의 현금을 무차별 흡입하는 그 유명한 셀프리지스 (Selfridges) 백화점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중 구찌 (Gucci) 로고가 무한반복으로 프린트된 벽지 같은 티셔츠에 목욕탕 쓰레빠같은 고가 고무신을 끌고 다니는 한국인 관광객도 물론 섞여있을 테고. 실제로 로고마니아를 앓는 한국인 지인은 자기 런던 아파트 앞 구멍가게에 ‘MJ’ 알파벳 두 글자가 현란하게 찍힌 마크 제이콥스 (Marc Jacobs) 원피스를 입고 갔더니 주인 아저씨가 오랜 관찰 끝 전통의상이냐고 물어봤단다. 박장대소 참느라 기절하는 줄 알았는데 정작 본인한테는 웃기지 않았나 보다. 아이러니한 건 마크 제이콥스가 자신의 아카이브를 통틀어 본인 이니셜로 도배한 유일한 드레스였을 것이다. 이 워너비 패션리더 언니는 면세점에서 취향 저격 드레스 찐득템했다고 무척이나 흐뭇해했었을 거고. 패션 리더가 아니라 패션 빅팀 (victim)이 되버렸다는걸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
나는 호텔 로비에 들어가 지하 볼룸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한벽면에는 도이처 크레딧의 로고와 회사 구호가 크게 확대되어 있어다: “Passion to deliver.” 여기서 deliver는 ‘업무 따위를 성사시키다’란 뜻이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호텔 투숙객은 무슨 글로벌 택배업체 세미나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명찰을 픽업하기 위해 행사장 볼룸앞 리셉션 데스크로 걸어갔다.
“Hi there, which office are you from?”
(안녕하세요. 어느 오피스에서 왔나요?)
“Hi. Seoul please.”
(안녕하세요. 서울이요.)
인사과 직원처럼 보이는 여자는 100명 연수생들의 명찰이 든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었다. 이름은 도시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대충 보니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 도쿄 섹션이 압도적으로 두꺼웠다. 빨간 손톱이 분주히 움직이더니 'SEOUL'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명찰 하나와 서울이라고 적힌 섹션 디바이더를 뽑아버렸다. 어차피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Here you go. If you could please stay in the hall and mingle around with the other graduates. You’ll all be staying here for three months after all! The morning address will start at 10am.”
(자 여기요. 홀에 계시고 다른 연수생들과 어울려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이 공간에서 다 함께 3개월을 보낼 테니까요! 조회는 10시에 시작될 겁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명찰을 자켓 주머니에 차고 볼룸 대합실로 이동했다. 각국 각지에서 온 백여 명의 연수생들이 커피 한잔씩 뜰고 악수하며 가벼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들 자기 나라 연수생과 어울리고 있었다. 30명 정도가 런던 지사에서 뽑혔는데 인원이 많다 보니 캠브리지학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창들도 여러 있다고 어디선가 흘려들었다. 난 글로벌 일류 인재를 육성한다는 연희대를 졸업했지만 막상 해외의 이런 자리에 오게 되면 스카이 간판대학의 쓸모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디서 대학 나왔냐고 물어보면 그냥 한국에서 나왔다고 답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신촌 지성의 등대 연희대가 하버드보다 입학 경쟁률이 치열하다고 말해봤자 누가 인정해 주겠느냐..
다짜고짜 어느 긴 흑발의 동양 여자가 내 앞에 성큼 다가왔다. 누나뻘로 보였다.
“Hi, I’m Lisa. I’m from the Bangkok Office. There’s two of us here and I can’t find the other!”
(안녕, 리사라고 해. 방콕 오피스에서 왔어. 방콕에서는 두 명이 보내졌는데 다른 한 명이 안 보이네!)
심지어 방콕 지사에서도 두 명이 선발돼 여기로 보내졌다. 나처럼 혼자 있는 게 뻘쭘해서 말 걸었나 보다. 그녀의 악센트는 완전 미국인이었다. 추측으로는 어렸을 때 미국유학에 보내져 명문대 졸업 후 방콕으로 돌아가 도이처 크레딧의 현지사무소에 지원한 듯하다. 전형적인 하이소 (태국 상류층 부자) 집안 딸이었을 텐데 나름 공격적이고 헝그리 한 정신이 느껴졌다. 앞으로 리사는 조숙한 관능미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남자 연수생들을 한둘씩 정복해 문화교환하게 되고 그중 하나와 결혼까지 간다. 그녀처럼 연수 프로그램에 본인의 사회적 자아를 맡겨 취업, 연애, 결혼까지 수순되로 해결하는 오마카세 풀코스 신입사원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않을까 싶었다.
“Hi, I’m Saejin. From the Seoul office. So we finally made it here, haven’t we?”
(안녕, 서울 오피스에서 온 세진이라고 해. 결코 우리 여기까지 왔네, 그치?)
리사가 웃었다. 내 말의 뜻을 이해했나 보다. 몇 차에 걸친 산 넘어 산식의 인터뷰 난관을 뚫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이런 해맑은 안도의 웃음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Nice tie by the way.”
(근데 넥타이 멋지다.)
서울 떠나기 전 수지가 선물해 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리사의 뚫어지는 시선은 나체로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여인들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수놓은 빨간 실선을 따라 내 가슴 하단으로 점점 내려갔다. 생초면에 면전 스캐닝을 당하는 좀 어색한 상황이었다. 머리 수면 위로 떠오른 첫 생각을 내뱉었다.
“Doesn’t it suck we have to go back to our home offices?”
(다시 본국 오피스로 돌아갈 생각 하니 짜증 나지 않냐?)
“Who said I’m going back?”
(누가 내가 다시 돌아간데?)
그녀의 눈빛은 뜨거운 햇살에 의해 빛나는 방콕 차오 프라야 (Chao Phraya) 강 표면처럼 반짝였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안간힘을 다해 모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오기로 런던에 끝까지 버티고야 말 거라고.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그녀도 희끗희끗한 아침 광선을 반사하는 한강처럼 희망에 부푼 내 동공을 보고 내가 결코 서울로 순수히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의 의도가 기묘하게, 게다가 무언중에 발각되었지만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동지를 만나 위안을 얻었다. 우리는 앞으로 산 넘어 산,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했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연수 프로그램의 첫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There’s Lamai! The morning session’s about to start. I’ll see you inside the ballroom.”
(저기 라마이 있네! 아침 일정이 곧 시작되겠네. 볼룸 안에서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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