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좋아하게 된 즉흥적인 인간
나는 명실상부 mbti P형인간이다.
계획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멀기만 한 단어이다.
계획 : 앞으로 할 일의 내용·방법·기한 따위를 미리 생각하여 정하는 것. 또는, 그 정한 내용. 플랜(plan).
살면서 방학계획표 말고 할 일의 내용/방법/기한을 먼저 정한 적이 있던가.
하다못해 방학계획표를 지킨 적이 있던가.
방학이라는 것이 가물가물한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커리어우먼이라는 것이 되었지만 내 하루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출근하기
2. 밥 먹기
3. 퇴근하기
그 와중에 J형 인간 군상에 대한 동경은 늘 있어서
매년 다이어리를 샀지만
(그리고 다이어리는 늘 중고거래는 할 수 없는 애매한 새것으로 남겨진다)
올해는 그런 환경오염을 멈추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도 J처럼 알찬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아~ 오늘 하루 참 알찼다~' 생각하며 잠들고 싶었다.
약속이 없는 날이면 무계획으로 딩굴딩굴 하루를 보내고 나서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오늘 하루 뭐 했나 드는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올해는 태생적으로 나는 시간표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만족하며 끝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과 실험들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나는 어렵사리 하루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나날들이 늘어났는데, 할 일을 만들고 채워나가는 그 시간들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어쩌면 시리즈에는 그 시행착오 과정을 담아보려고 한다.
(P 여러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평생을 살아온 당신
계획을 세운다고 동그라미 생활 계획표를 세우고 있는 건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계획을 짜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을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내가 처음 선택한 것은
시간 단위의 생활표였다.
그래도 직장인 짬빠가 생겨서 그런가, 꽤나 발전하긴 했다.
(어렸을 때보다 쪼금 더 어려운 단어를 쓴다는 점에서)
오전 6:20 기상
오전 7:00 출근버스 탑승
오후 7:00 퇴근 후 귀가
오후 8:00 영어공부
오후 9:00 독서
신나게 계획을 짜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다음날부터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내가 도통 그 시간에 영어공부와 책 읽기가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영어 공부 할 시간인데 → 해야 하는데(앉으며) → 해야 하는데(누우며) → 해야 할까?
이런 시간이 반복되면 오히려 계획을 안 짜느니만 못하는데,
계획이 없었으면 차라리 그 순간 내키는 어떤 생산적인 일이라도 해냈을 텐데,
해야 되는데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하면,
'잠깐만 쉬었다가 할거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숏츠와 릴스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깐만 잠깐만 하다가 밤이 되고 만다.
내가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아예 시작하기 전에 내킬지 안 내킬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생각하지 않고 일단 하는 것이다.
간단한 일들에 대해서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특히, 아침 루틴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할 수 있었다.
Time에 따른 계획이 아니라 조건부 루틴을 세웠다.
1. 눈을 뜨면 이불을 정리하고 차를 내린다
2. 차가 우러나면 일기를 쓴다
3. 버스를 타면 영어 어플을 켠다
4.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나면 책을 들고 침대로 간다.
각각의 항목을 보면 모두 하는 데 3분이 걸리지 않는다.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3분 이하이기 때문에 '에라이' 하고 쉽게 해낼 수 있다.
하지만, 하고 나면 귀찮았던 마음이 많이 사라져서 더 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전처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키지 않는 일들도 많았다.
책을 들고 침대로 가기 까지만 성공하고, 다시금 유튜브에 빠지는 날도 많았고
헬스장까지 간 이후에, 신발만 갈아 신었다가 거의 고대로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가장 실패가 높았던 루틴은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GPT와 영어 주제 정하기였다.
영어로 말하기도 아니고 단순히 영어 주제 정하기였는데, 딱 3일 성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루틴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갑자기 GPT와 영어 주제 정하기라니,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식으로 늘 내키지 않는 나를 살살 달래서 내키도록 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루틴을 지키면, 실질적인 원했던 결과를 못 이루더라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명상 루틴을 추가했는데 명상을 하기로 앉아서 1분하고 다시 잠들었다고 해도, 명상 자세 잡기까지가 루틴이었으니까 루틴은 성공한 것이다! (합리화인가?)
그리고 어플을 깔아서 체킹 했다.
나는 마이루틴이라는 어플을 사용했는데, 몇 개월 사용하다 보니 오류가 많아서 사용성이 좋지만은 않지만,,
체킹 하는 이모티콘이 귀여워서 아직 사용하고 있다. (더 좋은 어플이 있다면 추천해 주세요 글벗님들!)
체킹이 쌓여가니 꽤 뿌듯했다. 포도 스티커를 모으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루틴들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1시간이면 모두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무의미하게 보냈다고 생각해서 자괴감에 빠진 날이면
정신 차리자 하고 밤 11시에도 모든 루틴은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하루 아무 루틴도 하지 않았으면 더 우울해지긴 하겠다ㅠㅜ
오늘은 어쩌면 P형 인간의 하루 알차게 보내기 대작전을 소개한 느낌이지만,
꽤 좋은 시간들이 되기 때문에 세상에 글로 남기고 싶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루틴은
- 눈뜨면 물 한잔이랑 영양제 먹기
- 이불정리하고 잠옷 개키기
- 버스 안에서 명상하기
- 운동복/수영복 챙겨서 헬스장/수영장 가기
- 독서
- GPT랑 영어로 주제정하기
- 일기 쓰기
이다.
특히 아침 루틴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운동도 헬스장/수영장에 가기만 하면 20분이라도 하니까 운동량도 전보다 많이 늘었다.
GPT랑 영어로 주제정하기랑 독서, 일기 쓰기는 성공률이 낮은데
이 루틴은 더 쉽고 내가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수정할 예정이다.
이렇게 하니 습관이 된 루틴들은 너무너무 기특하고 장하고 멋지고 뿌듯하다.
그리고 내가 성공하지 못한 루틴들도 고쳐서 내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리도록 바꾸면 되니까 괜찮다.
흐음, 이번에는 루틴을
- 독서 → 자기 전에 책 펴기 (안 읽어도 됨)
- GPT랑 영어로 주제 정하기 → 스픽 어플 켜서 말 한마디만 하기
- 일기 쓰기 → 일기 주제 정하기
로 바꿔봐야겠다
벌써 알찬 시간들이 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여러분, 계획은 정말 좋은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