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몬트 병은 내게 무서움과 그리움이 동시에 담긴 유리병이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를 키워주신 분은 친할머니였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첫 손녀라며, 할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세상의 모든 사랑을 쏟아주셨다. 할머니의 사랑은 매일 밤 큰 솥에 끓이던 보리차처럼 따뜻하고 진했다. 나는 그 보리차를 밥그릇으로 떠서 마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리차 한 모금은 할머니의 품속 같은 온기였다.
나는 그 일상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고모가 우리 집 2층으로 이사왔다. 고모의 보리차는 달랐다. 고모는 반짝이는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였고, 삑- 하는 소리가 나면 뚜껑을 열어 보리차를 식혔다. 그리고 그 보리차를 델몬트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우리가 고모네 집에 놀러 가면, 고모는 어여쁜 쟁반에 델몬트 병을 꺼내 예쁜 유리컵에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투명한 컵 속에서 반짝이던 보리차는 마치 특별한 무언가처럼 보였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날부터 나는 할머니를 졸라댔다. "할머니, 델몬트 병 사주세요." 할머니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지만, 고쟁이 속 쌈짓돈을 꺼내 델몬트 주스를 사오셨다. 나는 할머니보다 델몬트 병이 더 좋았다. 동생과 함께 주스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델몬트 병은 이제 우리의 보물이었고, 우리는 서로 먼저 보리차를 담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에 고모가 달려왔다. 깨진 병 조각을 본 고모는 극성맞은 우리를 빗자루로 혼내셨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욕을 내뱉으며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셨다. 동생과 나는 두 팔을 번쩍 들고 벌을 서며 서로가 잘못했다고 밀어댔다. 하지만 할머니는 델몬트 병이 깨진 것보다,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던 그 마음이 무너진 것이 더 아프셨을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델몬트 병에 담긴 보리차보다, 찌그러진 솥단지에서 끓여주시던 보리차가 훨씬 더 귀한 것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고 있다. 그 보리차 한 사발 속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나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것을. 그 보리차가, 할머니의 손길이, 이제는 그립고 그립다.